부동산 전쟁과 노블리스 오블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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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전쟁과 노블리스 오블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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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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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리스 오블리주라 하면 보통 빛나는 갑옷을 입은 중세시대의 기사가 전장을 이끄는 장면이나, 2차 대전 당시 영국 귀족의 자제들이 참전하는 모습 등을 상상한다.

본토보다도 우리나라에서 유독 유행한다는 이 표현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 상황에서 왕족, 귀족 등 상류층들도 전장에 나가 나라를 지키는 숭고한 원칙처럼 알려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 고상한 원칙인 것만은 아니다. 하다못해 일개 마적 때에서도 두목이 먼저 칼을 잡고 앞장서지 않으면 영이 서지 않는다. 두목이 숨는데 알아서 목숨 걸고 싸워줄 졸개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이치이다. 한 국가에서도 존망이 걸린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리더가 먼저 희생의 결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민중들이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킬 리는 없다.

그래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위기의 상황에 필요한 일종의 ‘원초적인 규율’에 가깝다. 리더들 자신들은 뒷걸음질 치면서 도망치는 사병만 처벌할 수는 없는 것이다. 리더들이 먼저 나아가 싸우지 않는 이상 전선은 무너질 수밖에. 리더가 몸을 사리며 부하들의 목숨만을 요구할 때 전선은 이미 무너진 거나 다름없다.

말을 돌려 우리나라 주택 부동산 문제로 가 보자. 우리나라의 부동산 문제도 하나의 전쟁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모든 국민들이 그토록 애타게 일하고 저축하며 노력하는 최종 목표라면 결국 ‘똘똘한 집 한 채’를 가지는 것이다.

문제는 집 한 채를 가져도 싸움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요 지역의 아파트 가격이 수년간 두 배가 넘게 올랐다. 평생 만지기 어려운 십억 돈을 불과 몇 년 사이에 아파트 한 채로 마련하기도 한다. 이러다보니 누군가는 부러움 때문에, 누군가는 좌절감 때문에라도 부동산 전쟁에 말려들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아파트 분양권 추첨 장에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아비규환을 이루는 모습은 말 그대로 전장과 같다. 모두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위해 모두가 평생토록 투쟁하는 것, 이것이 전쟁이 아니고 뭘까.

드디어 정부도 부동산, 주택문제가 하나의 거대한 전쟁임을 인식한 것 같다. 전에 없던 고강도의 규제가 이어지고 있다. 집을 사고 팔며 대출하는 행위 전반에 제약이 가해지고 있다. 연이어 발표되는 부동산 정책은 경제 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논란이 나올 정도로 전에 없이 강한 것들이다. 마치 전쟁 상황에 등장하는 원초적인 규제와 같다. 이런 규제가 과연 타당하고 효과적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하나의 전쟁이고, 전쟁에는 원초적인 규율도 필요하다는 점은 일견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원초적 규율의 전제를 고위 정책가들이 과연 알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다. 숭고하고 고상한 희생의 규율이 아닌, 전시에 필요한 원초적 규율로서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말이다. 전쟁의 상황에서 민중의 자유를 박탈해야만 할 때, 필히 동반되어야 하는 규칙으로서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의문스럽기만 하다. 관련 주요 공직자들 상당수가 강남 주택 소유자, 다주택 소유자라는 사실이야 어디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니고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다주택자를 고통스럽게 하겠다, 모두 주택을 팔아라’ 라며 연일 엄포를 놓고는 그들 자신도 다주택을 포기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가관이다. 지방과 서울 아파트를 놓고 고심하다가 결국 평수도 작은 서울 아파트를 선택했다는 한 고관대작의 소식은 차라리 고마울 지경이다.

결국 어떤 선택이 좋은 선택인가를 애매한 말이 아닌 명쾌한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므로. 주택가격 안정, 지역균형발전, 지방 활성화, 다 좋은 말들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정책가들의 말이 아닌 행동에서 메시지를 읽는다. 그리고 일련의 상황에서 국민들은 이미 다 눈치를 챘다. 그들 자신도 전장에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는 것.

다시 말하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전쟁 상황에 필수적인 원초적인 규율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없는 전쟁에는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희생이 없는 전쟁에서는 승리도 없다. 결국 부동산 전쟁은 팬데믹 만큼이나 앞이 보이지 않는 길고 긴 싸움이 될 것 같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역사가 직접 뭔가를 암시하고 싶은 듯하다. 딱 이 시점에 맞추어 수도권 인구가 드디어 비수도권 인구를 앞지르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흘러 나왔다. 역사에 단 한번 있는 이 교차점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며 생각해줄 고관대작이 있기나 할 지 모르겠다. 김주일 한동대 공간환경 시스템 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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