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미쳐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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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쳐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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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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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은의 사적인 LP
오성은 작가
크라잉넛의 ‘25주년 베스트앨범’

-말달리자
2019년에 발표한 나의 곡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는 멕시코 소설가 후안 룰포의 동명 단편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라는 대사는 간절하면서도 괴상한 절규로 들려왔고, 그야말로 운율이 실린 멋진 문장으로 뇌리에 박혔다. 음악을 만드는 동안 획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우연한 기회에 내가 통기타로 연주하며 부른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를 들어본 이들은 라이브가 더 좋다고 위로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바짓단을 붙잡고,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버스킹을 위해서 만든 곡이기에 직접 부른 나로서는 통기타 버전이 더 친숙한 탓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스튜디오 음악과 라이브 음악은 다르다. 청자의 입장에서도 스튜디오 음악을 기대하는 뮤지션과 라이브 음악을 기대하는 뮤지션이 나뉘기도 한다. 나의 경우 스튜디오의 낯설고 엄숙한 분위기 탓인지 라이브가 훨씬 편하고 자유롭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왜 그런지 곰곰 생각해보니, 내가 ‘크라잉넛’을 듣고 부르며 학창 시절을 보냈기 때문인 것만 같다. 그보다 큰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잘 없다. 열다섯 살이 듣기에도 <말달리자>는 조금은 미친 음악이었다.



-밤이 깊었네

크라잉(cring)과 넛(nut)이 합쳐져서일까. 크라잉넛의 사운드에는 찐득찐득하면서도 달콤 쌉싸름한 맛이 느껴진다. 뽕짝 같은 구수함도 있고, 돌발적이고 돌연한 대범함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음악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장르를 말해보라면 역시나 펑크다. 25년 전의 그들은 메이저 문화에 흡수되기 어려운 다소 철부지의 모습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색깔이었고, 인디문화의 정신이었으며, 그들이 일궈낸 25년 역사의 압축본이었다. 오히려 지금 돌이켜보니, 무대 위에서 총총 점프하며 운율에 맞춰 닥치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라면 달려가서 끌어 안아주고 싶을 정도다. 내 또래에게 변성기를 조금은 일찍 안겨주게 한 그 호쾌한 멜로디의 향연이 펑크의 정신이라는 걸 나는 크라잉넛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게는 펑키하다는 말이 크라잉넛하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본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이미 세월은 펑키하게도 나를 25년이나 관통해버렸다.

‘어차피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이길 적수가 있겠는가. 그냥 외치는 것은 아니다. 멜로디는 조화롭고, 신나며, 무엇보다 살아있다. 크라잉넛은 라이브에 더 적합한 그룹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크라잉넛 콘서트 현장에는 스튜디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강렬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아우라(aura)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저 이 말을 기어코 뱉어야만 하겠다.

미쳐 날뛰는 음악.

나는 바로 그런 음악이 그리웠다.

-다죽자

나와 내 친구들은 노래방에서 <말달리자>를 불렀다. <밤이 깊었네>를 부르고, <룩셈부르크>도 불렀다. <명동 콜링>과 <좋지 아니한가>를 불렀다. 정말 신이 나서 불렀는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는 노래들이었다. 노래를 불렀다기보다는 외쳤던 것 같다. 아니, 고함쳤고, 소리 질렀고, 그냥 미쳤었다. 노래가 나인지 내가 노래인지 모르는 지경이 되고서야 우리는 현실로 빠져나왔다. 그래서일까, 25주년 기념 앨범을 <다죽자>(all die)로 맺는 까닭은 그들이 단 한 순간도 변한적이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만 같다. 다죽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변한 건 오직 점잖은 척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이다.

오랜만에 크라잉넛의 신나는 음악을 듣자, 잊었던 무언가가 다시금 떠오른다. 언제나 생기로 가득 찬 이들의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공연장에서 만나는 그날까지 건강하게 지내시길. 그러다 잠시 미쳐도 되는 날에는 이들의 LP를 턴테이블에 올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25년 동안 한결같았다는 것만으로도 박수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공연장의 아우라만큼은 아니겠지만, 잠시 미치는 데에는 충분한 사운드를 선사할 것이다.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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