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안 낳고 그동안 뭐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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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안 낳고 그동안 뭐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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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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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숲에서 아이들과 노는 일을 하고 있다. 숲, 아이들, 놀이….

한없이 명랑해 보이지만 유아숲교육이 업계 3D업종인 이유는 해본 사람만이 안다. 이 행복한 중노동을 너무 하고 싶었다.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고 여러 실습기관을 찾아 무상으로 품을 팔았다.

한번이면 족한 걸 자발적으로 반복한 이유는 한 가지, 인생을 통틀어 해보지 않은 일이어서다. 숲과 아이들이 나를 통해 연결되고 그 아름다운 시간이 아이들에게 각인될 것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났다.

각성은 내 안에서 뿐 아니라 밖에서도 일어났다. 전혀 다른 곳에서 쌓은 20년간의 경력보다 개인의 신상이 걸림돌로 작용하는 세계를 반백 살 즈음에 처음 만난 거다. 신선하고 충격적인 첫 경험이자, 기자로 밥벌이할 땐 상상할 수 없던 차별이었다. 시쳇말로 지금 당장 채워질 수 있는 스펙이면 용을 써보련만 이건 뭐 생물학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호수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마당에 이제와 어디서 출산의 스펙을 쌓는단 말이냐.

안타깝지만 ‘출산과 양육 경험이 없으셔서’라는 여자의 면전에 대고 탄식 같은 단발마가 새어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를 한 번 낳아볼 걸 그랬죠. 낳는 건 키우는 것보다 쉽다 잖아요. 여자가 멋쩍게 웃었다.

나이를 이만큼 먹고도 미혼인 여성은 기혼인 여성보다 왕왕 미숙한 존재로 인식되고, 전문성과 경험이 서로 혼동되고 있는 현실이 지겨울 정도로 답답했다. 나로선 처음이지만, 얼마나 많은 사회구조들 속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아이들과 함께 놀다보면 심쿵하는 순간이 여러 번 찾아온다. 고루하고 경박한 내 언어 대신 그들의 생생한 언어를 나누는 기쁨이 있고, 그들의 눈 속에 내가 보지 못하는 우주가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역할놀이다. 나는 아이들이 역할에 빠져들도록 숲의 모든 자연물들에 이름을 붙여준다. 거미가 왜 3층으로 거미집을 짓는 지, 매미는 왜 7년 동안 땅속에 있는지 아이들의 눈으로 숲을 안내한다. 아이들이 흠뻑 빠져들어 탄성을 연발하다가 궁금한 걸 묻느라고 입술이 오물락조물락해지면 내 역할놀이는 성공이다.

이때 ‘결혼하지 않은 기자출신 작가’라는 내 신상과 이력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숲에서 한바탕 매미, 민들레, 수리부엉이가 된다. 집에 가면 싹 잊고 잠이 들지만 그날의 숲은 아이의 먼 기억 속에 남았다가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따뜻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인생의 시기마다 주어진 롤, 즉 역할이 있다. 삶이 거대한 숲이라고 한다면 미생물부터 포식자까지 무수한 존재들이 내 삶을 채워가고 있다. 언제 어느 때 상승과 하강이 찾아올 지 누구도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모든 질문과 대답은 나 자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거다.

이 원칙만 있다면 내 비혼을 왈가왈부하건, ‘애도 안 낳고 뭐했냐’건 말건 깔깔 웃어넘길 수 있다. 내 인생의 롤은 그 너머 깊고 아름다운 숲에 있기에. 안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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