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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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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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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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포터의 ‘Liquid Spirit’를 들으며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Hey Laura, it’s me

그레고리 포터를 어디에서 처음 들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워낙 편안하고 듬직해서 아껴 듣지 못했고, 귀하게 여기지 못했다. 한동안 떨어지지 않고 함께 보냈는데, 이젠 그의 앨범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목소리에는 배를 탈 때 입은 구명조끼처럼 안심이 되면서도, 이륙 전 좌석을 꼼꼼하게 확인하는 승무원의 철저함이 녹아 있다. 분명한 건 그는 꽤 긴장된 순간마다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고, 내가 흥얼거리는 멜로디나 무의식적인 노랫말, 가벼운 휘파람과 박자감 있는 고갯짓 모두 그의 영향이 닿아 있었다.

190cm의 키에 100kg이 넘는 이 거구 아저씨가 재즈 햇을 꽉 눌러쓴 모습은 제법 귀엽기도 하지만 특유의 저음으로 ‘.’하고 부를 때면 나는 돌연 어느 대문 앞에서 로라를 부르고 있는 입장이 되고 만다. 그러나 로라네 집 대문은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 노래의 운명이기도 하다.



사연을 터놓는 자리

그런데 정말 그를 만난 건 언제였을까. 돈이 부족하던 시절에도 여행에는 진심이었던 나는 저가행 비행기로 훌쩍 떠날 때가 많았다. 공항에서 열 시간을 대기할 때도 여러 번이었고, 궂은 날씨에 항공기가 연착되면 하루가 그냥 지나가기도 했다. 그럴 때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그의 음악을 찾았고, 기대했던 바로 그 목소리에 안심할 수 있었다. 로라는 아무리 불러봤자 대답하지 않을 텐데, 어쨌거나 로라를 부르고 있는 건 내가 아닌 그였고, 그 바람에 내가 대신 대답해줘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로라는 나오지 않을 거랍니다. 그러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 주시죠. 포터 씨.’

나는 그를 꽤 측은하게 여길 때도 있었다. 이 같은 감정의 이입을 공감대라고 할 때, 그레고리 포터에겐 확실히 공감대의 형성이 일어난다. 그가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자라왔고, 어떤 과정으로 꿈을 포기하게 되었으며, 노래는 또 삶의 어떤 의미가 되었고, 어떻게 재즈 뮤지션이 되었는지……. 이상하게도 나는 그의 삶을 듣지 못했고, 보지 못했는데도 알 것만 같다. 늦깎이 신인 뮤지션의 활약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그래미에서도 그를 인정해주었다. 정말 사연 많은 목소리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 사람에게는 사연이라는 게 있고, 그레고리 포터는 마치 주술을 하듯 그 사연을 터놓는 자리를 마련하는 건지도.



여백의 음악

확실히 그의 음악을 들을 때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고민을, 그레고리 포터 씨가 들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음악은 내가 듣고 있는데, 내 고민을 그가 들어주는 느낌이라니. 여백이 담긴 몇몇 뮤지션들에게 비슷한 감흥을 받을 때가 있었다. 세련되고 웅장하고 힘이 있는 음악이 좋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이렇게 배워가는 과정에 있다. 그럴 때면 포터 씨를 은연중에라도 응원하게 되어버린다.

‘로라 님, 문은 안 열어준다 치더라도, 그만 포터 씨를 되돌려 보내는 건 어떨까요.’

뭐 연애 문제는 둘의 문제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오늘은 그의 편에 서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레고리 포터를 어디에서 처음 들었더라. 이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텐데, 자꾸만 집착하게 된다. 나나 포터 씨나 제법 집요하긴 마찬가지인 것 같고, 때론 그 감정 속에서 몽골한 멜로디가 솟아나기도 하는 것이다.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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