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편의 이집트 전쟁화(戰爭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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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이집트 전쟁화(戰爭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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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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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이집트 여행을 했다. 역사 전공자이든 아니든 이집트에 가면 제일 먼저 보고 싶은 장소는 피라미드일 것이다. 수학자 탈레스(기원전 6,7세기), 히스토리라는 단어의 기원을 남긴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기원전 5세기)부터 로마 황제들도 피라미드를 방문했으니 피라미드가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된 지도 2500년이 넘는다.

피라미드 다음으로, 어쩌면 피라미드 못지않은 명소가 람세스 2세가 세운 아부심벨 신전이다. 1960년대 아부심벨 신전이 아스완하이댐 공사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거의 10년간의 대공사로 신전 전체를 잘라 수면 위의 장소에 이전시켜 놓았다. 어릴 적 소년 잡지에서 읽은 이 신전을 눈으로 보니 감개무량했다.

하지만 내게 아부심벨 신전이 더욱 각별한 이유는 이 신전 내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람세스 2세의 전쟁화(戰爭畵) 때문이다. 기원전 1274년 람세스 2세는 2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팔레스타인 원정에 나섰다. 람세스는 현재 시리아 지역에 있는 카데시에서 소아시아(현재의 튀르키예)에서 5만 대군을 몰고 내려온 히타이트의 국왕 무와탈리스 2세와 대결전을 벌인다.

카데시 전투는 고대 중동에서 최고의 전쟁 영웅들이 최대의 병력을 이끌고 벌인 희대의 명승부였으며,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이기도 하다.

이 전투가 유명해진 이유가 바로 아부심벨 신전 벽면에 진하게 새겨 놓은 ‘카데시 전투도’때문이다. 채색벽화를 보존하기 위해 조명을 극도로 억제해 놓은 탓에 잘 보이지도 않고, 일부는 벽화가 탈락되어 있어서 아쉬웠지만 생각보다 크고 거대하고, 복잡했던 전투의 과정들을 상세하게 묘사해 두었다.

이 벽화를 보다가 재미난 사실을 하나 발견했는데, 이 벽화를 보고 카데시 전투를 정리한 사람과 보지 못하고 쓴 사람(사실 나도 여기 해당한다)을 판별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나도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벽화의 내용을 정밀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언제고 이 전투를 상세하게 다시 정리하려면 찍어온 벽화 사진을 보고 또 보아야 할 것 같다.

람세스는 카데시에서 완전히 패배할 뻔했다. 람세스는 이집트 신들의 이름을 빌려 아몬, 라, 프타, 세트라고 명명한 4개 사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히타이트군과 이집트군 사이에 카데시라는 강으로 둘러싸인 요새가 있었는데, 히타이트 군에서 탈영한 베두인족 병사 2명이 이집트군에 투항해 히타이트 군이 거의 200km 북방에서 대기 중이라는 정보를 제공했다.

그 말에 속아 넘어간 람세스는 서둘러 카데시를 공략하기 위해 아몬과 라 2개 사단만을 이끌고 카데시 앞에 주둔했다. 이것이 함정이었다. 무와탈라스 2세는 이집트군의 2배가 넘는 병력을 거느리고 카데시 뒤편에 매복해 있었다.

히타이트의 습격이 시작되기 직전 이집트군 정찰병이 진지를 벗어난 히타이트 병사 2명을 체포했다. 이상하게 여긴 람세스는 그들을 고문했다. 벽화에 보면 가늘고 긴 막대기로 마구 구타하는 장면이 보인다. 병사들은 진실을 털어놓았다. 놀란 람세스는 후방 부대에 급히 전령을 보냈다.

하지만 늦었다. 저녁 무렵 히타이트 군이 이집트군을 덮쳤다. 라 사단은 혼비백산해서 도주했다. 아몬은 람세스를 호위하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으나 패배는 시간문제였다. 람세스는 불리한 전황에 분노했고, 완전무장을 하고 자신의 명마 ‘테베의 승리’가 이끄는 말에 올라탔다. 이름이 전하는 이 위대한 말은 벽화에도 특별한 치장을 하고 당당하게 그려져 있다.

이집트 기록에 의하면 람세스는 광풍을 일으키며 슈퍼맨처럼 전장을 휘저었다. 이집트 벽화는 신과 왕을 주변 인물보다 크게 묘사하는데, 이 서술을 보면 신이나 파라오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정말로 저렇게 크다고 믿었던 것인가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친다.

람세스와 테베의 승리는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히타이트군을 향해 돌진한 주인과 말은 히타이트 전차대를 박살내고, 보병의 시체로 산을 만들었다. 히타이트군의 대장, 사령관, 왕의 두 형제가 모두 람세스에 의해 쓰러졌다.

당시 사람들도 이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겠지만, 람세스가 워낙 거대한 석조물들을 많이 세우고, 이 전투의 기록도 여기저기에 자랑해 놓았기 때문에 전황 묘사만 과장일 뿐 람세스가 승리한 것은 맞다고 생각했었다. 20세기 들어서 히타이트 쪽의 기록이 해독되면서 람세스의 거짓말이 들통났다.

히타이트 군의 공세를 늦춘 것은 람세스의 무용이 아니라 전리품이었다. 히타이트군은 용맹했지만 조직력, 통솔력에서는 이집트군에 부족했다. 히타이트는 여러 잡다한 부족의 연합체여서 일사불란한 통제가 쉽지 않았다. 라와 아몬 사단이 도주하자 히타이트 병사들은 이집트군이 진영에 버리고 간 노획물을 얻기 위해 마구잡이로 흩어졌다. 눈앞에 있던 군대가 다 사라졌으니 다 이겼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필 이때 후방에서 급히 달려온 프타 사단이 도착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모집한 용병단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혹은 프타와 세트 사단이 아니라 용병대와 후방에 쳐져 있던 병사들이라도 한다. 이들이 정예 용병인지 군수나 보조역할을 맡길 2급 부대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전장에서 꽤 활약한 것을 보면 프로 전사들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갑자기 나타난 부대에 히타이트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섰다. 이 역습으로 양측의 전황은 팽팽해졌으며, 양군은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후퇴했다. 무와탈라스가 무릎을 꿇고 자비를 호소한 적도 없고 그의 형제들은 전사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람세스는 전국 곳곳에 자기 거상을 세우고 이 전투를 자랑했다. 그런데 아부심벨은 그중에서도 특이하다. 나일강에서도 상류 쪽을 많이 내려와 사막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피라미드에서 아부심벨까지 가야 하는 이집트 관광은 큰 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람세스 시대의 기준으로 봐도 너무 먼 곳에 세워진 너무나 거대한 신전이다. 게다가 왜 이 신전의 내부를 하필 거대한 전투도로 채웠을까.

말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이집트 신전의 벽과 기둥, 관과 의자 같은 유물에는 그림과 상형문자가 문신처럼 빼곡히 채워져 있지만, 그 속에서 전쟁화를 찾기란 쉽지 않다. 필자가 이집트 전공자가 아니어서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 있는 이집트관이나 이번에 돌아다니며 본 곳에서도 전투화는 고사하고 무장한 병사들을 그린 장면도 보기 힘들었다.

그런 관행을 생각하면 아부심벨의 전투도는 특이하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누비아인들의 영역이라는 데에 힌트가 있다. 누비아족은 현재의 남수단 지역에 살던 사납고 용맹한 부족으로 용병으로 유용했지만, 그만큼 위험한 부족이기도 했다. 아부심벨의 카데시 전투도 반대편에는 누비아인들을 제압하는 람세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시리아에서 수단까지 람세스는 누비아인들에 자신과 이집트의 힘을 과시하며 억누르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신비하고 거대한 아부심벨 신전의 건립 목적이다.

람세스의 꿈은 실현되었을까. 600년쯤 지난 후 이집트에서 벌어진 전투를 묘사한 장대한 전투화가 하나 더 있다. 제작자는 이집트가 아니다. 아시리아의 아수르바니팔 2세의 군대가 멤피스 성을 공략하는 장면이다.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이 전투도에서 멤피스 성을 사수하는 병사들은 이집트인이 아닌 누비아인들이다. 속국처럼 살던 누비아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파라오가 되었다. 누비안 이집트는 하필 북방에서 내려온 아시리아인에게 멸망하는 바람에 장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타인이 되찾아준 왕국도 다스리지 못했다. 타국의 정복자에게 국방을 부탁한 뒤에 벌어지는 이야기는 정말로 씁쓸하다.

어쩌다 이집트가 이렇게 되었을까. 이 두 장의 전쟁화 사이에 이집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수백 년의 역사를 한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집트의 벽화들을 보면 안정과 풍요, 만찬을 너무나 사랑한다. 수없이 그려져 있는 제사상이나 만찬 장면은 육류, 조류, 생산, 채소 등을 상세하게도 묘사한다. 노예들이 들고 있는 음료도 종류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적어 놓은 곳도 있다.

이것이 하나의 단서가 아닐까. 풍요와 평안은 누구나 소망하는 것이지만, 국방을 위한 노력과 고통까지 평화의 제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 강건하던 스파르타도 사회에 풍요가 쌓이자 검과 방패를 내려놓았다. 스파르타도 다시는 명성을 찾지 못했다. 우리 사회도 전에 없던 부의 길에 이미 들어서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있을지도 모르는 풍요의 덫은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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