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나는 길들을 사랑했다. 세상의 아주 먼 곳까지 사방팔방으로, 도시와 사막과 바다와 산맥의 속으로 펼쳐진 길들의 모습은 나를 늘 설레게 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시간의 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누구도 의식하지 못한 채 길은 우리 곁에 늘 다가와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길이 시간의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 서 있었고 보이는 길 위에 또한 서 있었다. 시간을 헤쳐 나가는 것이 인생인 것처럼 길을 헤쳐 나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은 내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나를 포함한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의 길을 헤쳐 나가기를 바랐다.”(83쪽)
곽재구의 산문집 `길귀신의 노래’는 길 위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을 품고 있는 자연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특히 이 책 속에는 시인 특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소소한 우리네 인생들의 삶의 애환이 담겨있다.
4개의 장으로 나눠진 책의 첫 번째 장인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속에 담겨 있는 `두 아낙의 이야기’는 붕어빵과 국화빵을 파는 두 아낙의 이야기다.
문청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시인은 학교 앞, 붕어빵 집의 단골이었다. 눈이 흩날리는 겨울날 시인은 붕어빵 아낙에게 3000원어치만 달라고 말했지만 아낙은 근처 양로원에서 3만원어치를 주문했다며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시인의 채근에도 아낙은 기다리라고 말했고 그는 서운한 마음을 참고 기다렸다. 기다림 끝에 붕어빵 3000원어치에 덤으로 하나를 더 받아 오는 순간, 그는 험한 세상 꿋꿋이 살아오면서 아낙이 지키고자 했던 삶의 원칙을 느꼈다.
또 어느 날 그는 붕어빵을 사러가던 중, 제자들의 강권으로 국화빵을 샀다. 그가 자신은 평소 붕어빵을 즐겨 먹었다고 말하자 국화빵 아낙은 그가 종종 붕어빵을 사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순간 가슴이 뜨끔한 그는 다음에는 국화빵을 사겠다고 말했더니 국화빵 아낙은 국화빵도 한 번 사주고 붕어빵도 한 번 사달라고 말했다.
“다섯 걸음 간격으로 서 있는 두 대의 포장 수레에서 굽고 있는 붕어빵과 국화빵. 자신의 빵만 아니라 상대방의 빵을 함께 사달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이 따뜻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이 아니겠는지요?”(64쪽)
또 이 책에는 오직 시를 쓰기 위해 동기들의 집을 전전하며 퍽퍽한 삶의 무게를 견뎠던 한 문청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두 번째 장인 `와온 가는 길’에서는 순천만에 자리한 작은 바닷가 마을 `와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해 봄 이곳 바다에 들른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개펄에서 일하는 아낙들을 바라보며 `봄날의 꽃보다도 와온의 개펄이 더 아름답다’라는 얘길 했거니와 이는 훌륭한 육체 노동을 하는 갯마을 낙들의 삶에 대한 헌사에 다름 아니었다.”(101쪽)
따뜻하게 누워있는 바다라는 뜻을 가진 와온은 이름만큼이나 따스히 그곳을 찾는 사람들을 보듬는다.
시인은 이 책에서 와온과 관련된 일급비밀을 하나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와온은 만월의 시각에 가장 아름답다는 것.
“봄날 한 없이 둥글고 큰 달이 와온바다 위에서 달빛을 뿌릴 때면 세상은 온통 눈부신 꽃밭이 된다. 만파식적의 고요함 속에 달빛의 향기가 온 바다를 그윽이 흔드는 것이다.”(103쪽)
그는 길 위에 있었다. 그 누구보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곳에서 따스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길 위에서 인생이라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인 곽재구가 보내는 따뜻한 손편지. 그 편지는 우리네 마음 속 와온의 만월을 꽃피운다.
열림원. 307쪽.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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