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깊이
김선태 지음 l 문학동네 l 116쪽 l 8000원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춥고 쓸쓸할 때/깨끗한 외로움 하나만을 데불고 추자도에 가리/바닷가에 조개껍데기처럼 엎어진 민박집을 얻어/아무도 몰래 꼭꼭 숨어 한겨울을 견디리/밤낮으로 바람 소리 파도 소리만 듣다 질리면/혼자서 사무치는 객수감에 몸을 떨기도 하리//(…)//굴복하지 않은 자존들이 섬들로 떠 있는 추자도/나도 그 차가운 바닷물에 몸을 담근 섬이 되어/깨끗한 외로움 하나를 담금질하고 싶다”(‘추자도에서’ 중에서)
바다의 풍광과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세밀하게 묘사해온 김선태<사진>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그늘의 깊이’.
그는 이번 시집에서 바다에 가라앉은 오래된 것들을 언어로 건져 올린다. 그 언어의 발설은 한층 깊어진 성찰에서 비롯된다.
“아차 하면/순식간에 검푸른 파도가 삼켜버려/내로라하는 꾼들도 차마 근접을 꺼리는// 삶과 죽음이 나란한 직벽에서/대물과의 한판승부가/끊어질 듯 팽팽한 반원을 그리는 곳”(‘절명여’ 중)
시인에게 바다는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공간인 동시에 거친 풍랑에 무수한 뱃사람들의 생을 앗아가는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는 시를 통해 삶과 죽음이 나란한 고통스런 세상을 결연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들여다 본다.
“뭍에서 청춘을 다 덜어낸 텅 빈 조각배로 떠밀려와 이제 더는 갈 곳 없이 유형의 섬에 닻을 내린 그네들”(‘섬의 리비도8-흑산도 작부들’ 중)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됐다. 그 중 2부는 ‘섬의 리비도’ 연작으로 구성, 시적 모티브인 바다에 대한 관심을 해양민속생활사로 확대했다. 12편의 연작시에서 그는 바다의 포용성을,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미지와 나란히 배치했다.
시 ‘그늘’은 자기고백적인 시로 가난, 슬픔, 권위, 원망 등은 그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는 ‘한(恨)’의 정서다. 삶이라는 긴 터널을 살아온 그는 아직 찾아오지 않은 ‘흰 그늘’의 시간을 기다린다. 그 시간의 간극은 그에게 언어를 토해내게 하고, 그 언어는 시가 된다.
“구부러진/지리산 아랫마을 팔순 할미의 허리는/유장하게 굽이치는 지리산 능선을 닮았다/가만 보면/저녁 능선 위에 걸린 초승달과도 겹친다// (…)// 구부러진다는 것은 돌아간다는 것/늘그막에 어린아이가 되어 친정집에 들듯/원점으로 휘어져 회귀하는 일이다// 머잖아 지리산이 할미를 불러들일 것이다”(‘구부러지다’ 중)
팔순 할미의 허리는 고달픈 삶을 살아온 우리네 부모와 닮았다. 또 그 이미지에서 거침없고 당당하게 살아온 민중적 삶의 역동성도 느껴진다.
그러나 그 역동성 뒤에 감춰진 민중의 한과 슬픔은 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팔순 할미의 외로움과 더해져 더욱 절절해 진다. 행간과 행간 사이의 여백은 그 아픔을 다독이는 시인의 배려이다.
엄숙과 난해로 물든 현대시 속에서 거침없고 당당히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 자신만의 시적 세계를 구축한 김 시인.
그는 바다와 바닷사람들의 생을 ‘시’라는 자신만의 집에 품는다. 초라한 그 오두막집엔 짭쪼름한 바다냄새와 사람냄새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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