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 정재모] 주역 64괘 중 맨 첫 번째가 건괘(乾卦)다. 여기엔 잠룡 현룡 비룡 항룡 같이 널리 알려진 네 가지 용이 나온다. 이 괘 여섯 효 중 네 개의 효사(爻辭)에 각각 언급된 말이다. 아직 물에 잠겨 있는 잠룡, 때를 만나 물에서 나와 능력을 발휘하는 현룡, 인정을 받아 하늘 높이 힘차게 날아오르는 단계의 비룡, 그리고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위치에 오른 항룡이란 용어다. 잠룡(潛龍)과 항룡(亢龍)은 우리 정치판에서 곧잘 등장하는 낱말이다. 전자는 대통령 예비후보를, 후자는 대선을 통과한 사람을 각각 이른다.
“항룡은 존귀하다. 그러나 너무 높이 올라 교만해지므로 자칫 민심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남을 무시하므로 보필도 받을 수 없다” 공자가 주역의 의미를 풀어놓은 글, 십익(十翼)의 한 구절이다. 항룡은 하늘 끝까지 올라갔으니 남은 일은 내려갈 일밖에 없다. 변화와 동의어인 역(易/주역은 주나라 때 만들어진 역)의 핵심 메시지가 곧 무상(無常;변하지 않는 건 없다) 아닌가! 건괘 6효 중 맨 위의 효사 ‘항룡은 후회하게 된다(亢龍有悔)’는 구절도 내내 그 말일 테다.
주역은 가장 난해한 경서라지만 그 본질은 점서(占書)다. ‘항룡유회’란 예언이 과연 허랑치 않은 걸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얽혀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4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회한의 심경을 드러냈다.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하는 자괴감이 들어 괴롭기만 하다’고 토로한 거다. 엊그제는 국회의장을 찾아 국회가 추천하는 총리에게 국정을 맡기겠다고 했다. 그 말 들으면서 그 끝을 알 길은 없지만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주역 속 구절이 떠오른다. 무엇이든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한다는 뜻이다. 끝났다는 얘기다. 한데 주역에 의하면 이것 역시 또 다른 시작이다(終則有始). 지금 항룡을 넘보며 요동치는 잠룡들도 한번쯤 되새겨볼 만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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