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모두 가난할 때도 추석은 동리 잔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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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모두 가난할 때도 추석은 동리 잔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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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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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옥근
의학박사 

 
이틀 사흘만 지나면 몇 년 만에도 `올동말동’ 하는 그야말로 황금연휴!. 건너뛰고 달려 뛰어 8일간을 쉬어가는 중추절 팔월 한가위 날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예부터 추석을 우리민족의 최대 명절로 치고 있는 것은 한 살을 더 먹는 설날은 종(縱)적인 관계만 부각(浮刻)되어 있지만, 한가위는 식구 모두, 이웃 모두, 일가친척 모두의 개념이 더 있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설 명절은 한참 추워 서로의 왕래가 드물지만 일 년 열두 달 중 춥지도 덥지도 않는 날씨에 오곡백과가 풍성하고 미리 수확한 햇농사로 풍부하고 여유 있게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계절이기에 그러하다. 아마 내가 태어나 70평생 다 된 이 나이까지 내 기억으로 가장 어려웠던 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해방 후 5년 뒤 6.25사변을 맞으며 그 어간중(於間中)에 피폐할 대로 피폐한 당시의 멍든 기억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라는 말이 아직까지 전래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벌써 신문마다 추석 특수를 누리기 위한 선물 세트가 오가고, 진짜 실물 크기로 잘 찍혀져 나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호외별지로 우리 입맛을 자극한다. `정성과 실속’ 모두 담겼다는 말도 마음에 든다. 생활습관 환경변화도 우리 나이만큼이나 그때보다 변했다. 요사이 같은 불경기에도 백화점에 들어서면 돈이 없다는 말도 헛말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추석 명절하면 조석으로 기후 변화가 심해 쌀쌀하기 때문에 여름옷에서 가을로 접어들면 추석빔이라 해서  집집마다 목화 농사로 짠 옷에 검정물을 들여 한 벌씩 지어 입혀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머니가 밤잠 안자고 손수 바느질해 맞추어준 새 옷이 작나, 크나 보려고 시험 삼아 한 번 입혀 본 것을 도망 나가 동네방네 자랑삼아 돌아다니다가 새 옷 윗저고리 소매에 벌써부터 코를 닦아 윤기가 나 있다. 새 옷에 콧물을 묻혔다고 엄마한테 쫓겨 다녔던 일이 어제 같다. 추석에는 의례 그해 농사가 아무리 잘 안된 해라 할지라도 우리 동네에서는 돼지 한두 마리는 잡는다. 오늘 어느 집에서 돼지 잡는다고 말을 듣지 않았어도 우리 꼬마 친구들은 돼지를 잡을 때 지르는 금속성 그 예리한 소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는 일이 전혀 없다. 그 소리를 군호(軍號)삼아 어른들 보다 먼저 현장에 나타난다. 어른들은 동네 아이들에 돼지 잡는 잔인한 행위를 보이지 않기 위해 회초리로 우리를 내쫓고 하지만, 그 재미(?)나는 광경을 못 본 내 친구들은 한 사람도 없다. 돼지를 잡으면 어른들은 그 즉석에서 익혀 먹기에 바쁘지만 우리 꼬마들은 오로지 어른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돼지 오줌통(방광)을 꺼내 달라 해서 오줌을 비우고 보리대로 방광에 바람을 채워 질긴 실로 감아 매면 일등짜리 축구공이 된다. 이 걸작 축구공이 터질 때까지 먼지를 내면서 하루 종일 차고 다닌다. 이렇듯 추석은 동네잔치요, 노소동락(老少同樂)하는 놀이 마당이었던 것이다.
어찌 요사이 어린이들처럼 넘쳐나는 먹거리가 있었겠는가. 간식이란 말이 채 생겨나기도 전 일일 것이다. 그해 나온 첫 벼로 찐쌀을 말려 찍어 만든 `올벼쌀’을 한 되씩 정량 배급을 받으면 두 시간도 못되어 한 되를 다 먹어치운다. 그 다음날 까지 `아구(입)’가 아파 밥은 고사하고 물 한 모금도 못 마셨던 추억이 이 풍요로운 가을만큼이나 내게 다가온다. 나라가 크지 않고 좁은데서만 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을에 무슨 일이 있다면 온 동네가 다 알고 법석인 분위기가 우리 국민성에 박혀있다고, 지적한 분도 계시지만 못 먹고 모두 가난했어도 울며 찾던 내 고향, 회초리 맞던 내 동네가 울컥울컥 생각 날 때가 많다. 거기에는 정이 넘쳐 있고, 거기에는 진짜 사람 사는 냄새가 깊이 베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며칠 후면 `사천만의 대이동(엑써더스)’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이제 보따리마다 콩, 깨, 조, 자질구레한 것 까지 다 담아줄 어머니도 일가친척도 다 안 계신 그 동네 그 고향을 이제 더 이상 갈 수도 없지만 고향을 찾는 모든 이들이 우리 부모님이 자식사랑으로 덤북 쌓아준 그 보따리에 고향 한가위도 함께 싸 가지고 왔으면 좋겠다.  200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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