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의 사소한 스침이 데려간 풍경과 시간
  • 이경관기자
生의 사소한 스침이 데려간 풍경과 시간
  • 이경관기자
  • 승인 201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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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 허위의식 조롱하며 마이너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들 애증으로 보듬어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1976년 크리스마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눈도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명왕성이란 이름은 천체에서 사라졌고 그리고 화성에 내리는 눈,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그것은 지상에 영원히 닿지 못할 것이다.”(42쪽)
 봄이 왔다.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길 한편엔 녹지 않은 눈뭉치가 있다.
 은희경 작가는 최근 다섯 번째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를 펴냈다.
 은 작가는 생의 사소한 스침이 데려간 풍경과 시간을 6편의 소설에 오롯이 담았다. 그녀는 이 책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허위의식을 조롱하며 마이너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을 애증으로 보듬는다.
 표제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는 곧 스무살을 맞는 열아홉 소녀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렸다.
 눈이 내리지 않는 남쪽의 작은 도시에서 자란 안나와 그곳으로 전학온 루시아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서울로 올라온다. 낯선 서울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기만한 안나는 루시아의 남자친구인 요한을 짝사랑하며 그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보낸다.
 “하지만 낯선 곳에 가야 한다고 해서 저렇게 흐느껴 우는 건 아직 인생이 예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야. 매순간 예상치 않았던 낯선 곳에 당도하는 것이 삶이고, 그곳이 어디든 뿌리를 내려야만 닥쳐오는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어.”(66쪽)
 단편 `프랑스어 초급과정’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 낯선 신도시로 이주한 여자의 이야기다. 황무지였던 초창기 신도시, 작은 아파트에 살게된 그녀는 그곳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늘 남을 외롭게 했고 자신의 외로움을 감추지도 못했다. 영원히 적응하지 못할 시차를 지니고 타인들의 섬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94쪽)
 단편 `스페인 도둑’은 유년시절을 보낸 신도시를 떠나 이국땅으로 유학을 떠났던 완이 입대 전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시 신도시로 돌아와 겪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그렸다.
 이 외에도 대학 졸업 후 직업을 갖지 못하고 장기 출장을 떠난 친구 집에 머물러 있는 `이원’의 이야기를 담은 `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와 이국땅으로 떠나온 여자와 그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언제나 낯선 시간과 낯선 공간을 사랑했던 마리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금성녀’가 수록돼있다.
 “허기와 절망. 그런 감정들은 행복의 변방에서 서로를 알아본 순간 경계를 넘어 조용히 연대한다. 서로 이용하지만 거짓은 끼어들지 않는다. 스치듯 짧은 포옹을 끝낸 뒤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아마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연대일 것이다.”(116쪽)
 이 책은 책을 덮는 순간 비로소 진가를 발휘한다. 6편의 단편이, 단 한 송이의 눈처럼 세세한 입자 속에서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어 초급과정’에 등장하는 그녀와 그녀가 품은 아이는 `스페인 도둑’의 어머니와 아들 완으로 연결된다. 또 `다른 모든 눈송이…’의 안나는 `T 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에 등장하는 소년의 엄마와 겹쳐진다. `금성녀’에 등장하는 현과 완규는 다른 소설들의 소년들의 모습과 닮았다.
 은 작가는 각 단편 고유의 특징은 온전히 간직한 채, 유사한 캐릭터와 공간을 통해 에피소드와 모티브를 교차시킨다.
 소통이 단절되고 비상식이 상식으로 뒤바뀐 현대사회 속에서의 조직적인 연대, 이에 대한 희망은 우리를 더욱 고독하게 만든다. 이국땅과 신도시라는 낯선 공간 속에서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마이너 인생을 사는 사람들. 이들의 연대가 쓸쓸하지만 시리지 않은 이유는 아직은 따뜻함이 남아있다는 또 다른 희망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 관계의 상투성을 이야기하는 은희경. 그녀는 이 시대의 아픈 자화상을 표현해 내는 단 하나의 눈송이 같은 작가이다.
 봄눈이 내린다. 길 한편에 있던 눈이 비로소 다 녹았다. 우리는 그 겨울을 잊지 않기 위해 단 하나의 눈송이를 가슴 가득 품는다. 문학동네. 245쪽.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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