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거실에서는 소리의 입자들이 내리고 있다/살 흐르는 소리가 살 살 내리고 있다/30년 된 나무의자도 모서리가 닳았다/300년 된 옛 책장은 온몸이 으깨어져 있다/그 살들 한 마디 말없이 사라져갔다/살 살 솰 솰 그 소리에 손 흔들어주지 못했다/소리의 고요로 고요의 소리로 흘러갔을 것이다/조금씩 실어나르는 손이 있다/멀리 갔는가/사라지는 것들의 세계가 어느 흰빛 마을을 이루고 있을 것// 거기 가늘가늘 소리 들린다// 다 닳는다// 다 흐른다// 이 밤 고요히 자신의 살을 함께 내리고 있다.”(`살 흐르다’ 전문)
삶의 고뇌를 섬세한 감성으로 표현해 내는 신달자<사진> 시인, 그녀의 열세 번째 시집 ’살 흐르다’.
1964년 등단 이후 50년 동안 쉼 없이 시를 써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오롯이 자신 그대로를 담았다. 일상의 소재와 언어는 그녀의 손끝에서 시가 됐다. 이 시집에 실린 70편의 시들은 어둠이 세상을 지배한 밤, 그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는 고립의 새벽을 노래했다.
“바람 서늘한 날 당신 내 무릎 베고 눈감았다// 지금 그곳 환한가/ 흰 뼈가 마지막 빛으로 일어서고/ 이제야 소리 되지 않았던 속내를 수습하고 있다면 환하리// 법원읍 오현리 산 발밑에서 늘 윙윙거렸다/ 조마조마 지반 흔들리고/서로 헌 진물 모른 척 지나가던 세월/일으킬 수 없는 당신 몸 위에서 내 마흔 옥죄이는 알몸을 허허롭게 비벼 보기도 했지만/당신 가고 나 생각보다 찬란하지 않았어 여보……/쭈뼛/살얼음이 입속에서 어슥어슥 시려서”(`10주기(週忌)’ 부분)
어느 덧 일흔을 넘긴 시인은 질곡의 세월동안 고통과 절망 속에서 깨달은 인생의 빛과 그림자,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시에 담았다.
그녀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24년간 수발했고, 의지하던 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떠나보냈으며 암에 걸려 긴 투병을 하면서도 꿋꿋이 홀로 세 딸을 키웠다.
고통 속에서 더욱 단단해진 그녀의 시는 삶의 곡절마다 깊은 사유와 성찰을 통해 우리들의 삶과 맞닿았다. 어느새 눈물이 메마른 듯 목 놓아 울지도 않는 시 속 화자들은 더욱 애처롭다. 그녀는 삶 속에서 끝없이 마주하게 되는 이별, 그 처연함을 담담하게 읊조린다.
“그래… 오래전에 잃어버린 진주알은/지금 겨울밤 3시/바닥난 촛불 눈물에 구르고 있으리/어느 한 알은/ 얼어 곱은 너의 손으로 형상이 바뀐다/모른 척할 수 없는 세월이/다시 툭 신발 끈을 푼다/거기 아득한 바닷가 하늘이 터진 천장을 향해/눈물에 구워지는 진주알은/시간의 온기를 기억하려 크게 몸을 뒤집는다// 맨발이라는 것을/이미 그 바닷가에 신발을 벗어 놓고 와 버렸다는 것을/거기 한 알쯤 진주알이 있을까/ 거대한 고독의 은유 코끼리가 바다를 거니는 나라/모래로 허기를 메우다가/바다 가장자리에서 잠들고 천둥소리 듣지 못했다/진주알은 구르고 지구의 구석으로 소리 없이 미끄러질 때/지구의 반쪽이 무너지는 소리 듣지 못했다/밤은 비어 있어/오늘도 진주알을 찾기 위해 지구의 밑바닥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이 불치의 겨울밤.”(’무너지는 소리 나는 듣지 못했다’ 부분)
미처 피지도 못한 꽃들이 졌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8분 세월호가 침몰했다. 수학여행을 떠난다며 즐거워했던 아들, 딸들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또 아직까지도 저 차디찬 바다 속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그들에게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많은 우리들은 눈물이 마를 때까지, 바닷물이 마를 때까지 통곡한다. 서글픔이 가득한 그 바다에서 그녀의 시를 읊고 싶다. 지금도 검푸른 바다에서 한 없이 흐르고 있을 그들에게, 또 그들을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서툰 위로라도 건네기 위해.
신달자. 민음사. 133쪽.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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