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비지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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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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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스의 ‘Spirits having flown’을 들으며
▲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경북도민일보] △How deep is your love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조례 시간 마다 운동장 단상에서 애국가를 지휘하는 한 선배를 주시했다. 그 선배는 모든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소문난 인재였다. 어느 날 나는 무작정 선배를 찾아갔다. 선배는 4층 과학실과 화장실 옆으로 난 쪽문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먼지 쌓인 장구들과 드럼 한 세트 그리고 통기타 두 대와 베이스 기타와 앰프가 즐비해있었다. 선배는 앰프 위에 엉덩이를 걸터앉아 통기타를 조율하더니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와 시나위의 ‘은퇴선언’을 연달아 불렀다. 이에 질세라 나는 머리를 주억거리며 발 박자를 맞췄다. 선배는 흥에 겨워 드럼을 치기도 하고,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1998년 봄, 나는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는 통기타 밴드 동아리에 입단했다.
1년이 지나 지휘봉을 물려받은 나는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운동장의 단상 위로 올라가 애국가를 지휘했다. 새하얀 지휘봉을 우아하게 잡고 있는 중학생의 내면에는 광야를 노래하는 포크 가수들과 필라델피아의 힙합 갱스터가 동시에 자라나고 있었다. 그 둘의 결합은 메탈과 프로그래시브 록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갔다. 마침 힙합듀오 지누션이 ‘How deep is your love’를 재해석하여 발매했고, 그 바람에 포트레이트의 버전을, 레이 코니프의 버전을 찾아듣게 되었다. 이 노래의 원곡을 부른 비지스를 알게 되었을 때에도 나는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비지스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유행이 지난 옷처럼 촌스러워보였다. 나는 롤러장 세대가 아니었고, 나팔바지를 입어본 본적도 없으며, DJ라고는 DJ DOC밖에 모르던 소년이었다. 맹목적인 록의 열정을 핑계 삼아 고집스럽게도 다른 장르를 무시하거나 외면했다.

△비지스 산맥

그러던 어느 날 박진영이 나타났다. 마이클 잭슨을 표방한 댄서출신의 가수인 그는 스스로를 딴따라라 불렀다. 그의 음악들은 가볍고 통통 튀며 발랄했다. 나는 그를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메탈리카나 드림씨어터야 말로 진짜 음악이라고 말하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싸이라는 가수가 괴상하지만 날렵한 춤을 춰댔고 정체모를 그의 음악에 맞춰 나도 모르게 발끝을 슬쩍 움직이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움직이던 맥락 없는 음악의 정체성에 나는 혼란스러웠고 그제야 비로소 질문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음악이란 과연 무엇인가. 음악을 만들고 듣는 사람의 수만큼 그 이유 역시 무한하겠지만 나만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편협하지 말 것. 나는 음악을 가리지 않고 듣기로 결심했다. 재즈와 판소리와 밥 딜런과 킹 크림슨을, 마돈나와 다프트 펑크와 뉴에이지와 클래식을 듣게 되었고, 빌 에반스와 척 맨지오니와 도나 섬머와 잭슨 파이브를 찾아듣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비지스가 높고 가파른 거대한 산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비지스가 온다
배리 깁(Barry Gibb, 기타), 로빈 깁(Robin Gibb, 보컬/피아노), 모리스 깁(Maurice Gibb, 기타), 삼형제는 호주 브리즈번의 빌 굿(Bill Goode)에 의해 자동차 경기장의 막간 공연을 할 수 있게 된다. 어린 깁 형제(Brothers Gibb)는 B.G.S라는 아마추어 밴드를 시작으로 역사적인 그룹 비지스(BEE GEES)의 발판을 마련한다. 끝 음을 가볍게 튕기며 불편하지 않게 소화하는 팔세토 창법과 세 형제의 화모니는 점차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1977년 12월, 그들이 음악을 맡은 <토요일 밤의 열기 (Saturday Night Fever, 1977)>라는 단 한편의 영화가 전 세계를 뒤집어 놓았다. 디스코 문화를 탄생시키던 날이었다.
한 사내가 화려한 조명 아래에 등장한다. 깃이 긴 붉은 셔츠 사이로 보이는 금목걸이와 금색 벨트가 번쩍인다. 무스로 잔뜩 힘을 준 머리카락, 해군의 상징인 벨-바텀 팬츠를 변형한 나풀거리는 나팔바지와 굽이 높은 자주색 구두에 시선이 쏠린다. 업비트 사운드에 맞춰 색색으로 번뜩이는 조명, 미러볼, 스텝, 허공을 찌르는 손가락, 슬며시 짓는 미소들, 환호들, 골반들, 나란히 걷는 발걸음과 박수소리, 미니멀리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한 무도회장의 열기. 비지스를 듣고 있으면 발뒤꿈치가 슬며시 올라간다. 창문을 열고 청소를 하거나, 이불을 널거나, 빨래를 할 때도 그들의 사운드는 제격이다. 세 형제의 목소리가 모든 동작에 리듬을 부여하고 활기를 돋운다. 스텝은 가볍게 마음은 들뜨게 머리는 하얗게 이 밤은 뜨겁게, 비지스라는 발음마저 단순하고 경쾌하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세상을 사로잡았던 비지스의 열기가 없었다면 그 다음 세대의 음악은 늦어졌거나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다. 모든 것은 이전 세대를 지르밟고 앞으로 나아간다. 물론 음악은 그 역사 안에서 단 한 번도 죽은 적 없고 멈춘 적 없다. 실패한 적도 없다. 오로지 되풀이되고 있을 뿐이다. 영원히 돌 것처럼 빙빙 돌고 있는 저 LP판이, 뜨고 지는 태양이, 자전하는 지구가, 났다 사라지는 모든 생명들이 일러주고 있다. 음악은 돈다. 돌고 돌아 다시금 제 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비지스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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