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하며 변하다…그것은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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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하며 변하다…그것은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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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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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 빗소리, 새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 자연은 늘 반복한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잠을 자고 일어나고 또 잠을 자고 일어난다. 하루의 일과도 그렇다. 일어나서 세수하고 이를 닦고 밥을 먹고…. 반복에 또 반복. 하지만 똑같은 반복은 없다. 사실 이 반복은 어떤 형태로든 조금씩 변화하는 반복이기에 정확히 반복은 아니다.

필립 글래스(Philip Glass, 1937~)의 음악은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지만 새로운 형태로 나아간다. 그의 음악 중 ‘메타모포시스’라는 작품이 있다. 메타모포시스란 변형, 변태를 말한다. 애벌래가 나비가 되는 것.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며 점차 변형되는 이 곡은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됐다. 정체된 듯 앞으로 나아가는,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는 미로 속을 헤메는 듯한 이 음악은 절망과 희망을 오가는 내면으로의 여행과도 같이 느껴진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운영하는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며 다양한 음악을 듣고, 바이올린과 플루트를 연주하고, 현대음악 작곡 기법을 배운 그가 수 많은 음악을 접한 끝에 나온 음악은 단순한 반복이었다. 마치 단순함 속에 진리가 있다는 듯.

글래스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화가 사이 톰블리(Cy Twombly,1928- 2011)의 칠판화 연작이 생각난다. 어릴 적 교실에서 보았던 칠판을 생각나게 하는 회색바탕의 흰색선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반복에 반복을 잊는 선들. 점차 변형되는 크기와 모양. 언뜻 보면 그저 어린아이의 낙서에 불과해 보이는 이 작품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되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무제(뉴욕시)’와 같은 작품을 보면 작은 원에서 큰 원으로 반복을 거쳐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톰블리의 이런 작업 방식은 오토마티즘(자동기술법)을 떠오르게 한다. 오토마티즘이란 초현실주의 시와 회화에서 주로 썼던 기법으로 의도하지 않은 무의식적 상태에서의 이미지나 언어의 기록을 말한다. 무의식에 기대어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해 나가는 작업. 낙서란 어쩌면 애초에 무의식의 표현이 아닐까? 어릴 적 우리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닌, 그저 끄적이는 것을 낙서라 불렀다. 이렇게 특정 목적을 지니지 않은 채, 어쩌면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써 내려가고 그려냈던 것.

마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선의 반복은 무한으로의 확장을 꿈꾸게 한다. 그리고 내적 주시를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무한 반복될 것 같은 느낌은 글래스의 ‘해변의 아인슈타인’에서도 느낄 수 있다. 5시간에 달하는 이 오페라는 관객이 공연 도중에 출입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이 오페라에는 명확한 스토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사들도 그저 계명, 또는 숫자를 세는 정도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어떤 인과를 떠나 그저 흘러가는 듯한 이 음악은 반복에 반복을 더하며 무아지경에 빠지게 만든다.

“다른 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문제는 다름 아닌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머리에는 너무나 많은 소음이 발생하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내면의 대화는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우리가 제공하고 싶은 어떤 목소리든 될 수 있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소란스럽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보지도, 느끼지도, 만지지도, 맛보지도 않습니다”(필립 글래스)

특정 스토리, 또는 기승전결이 없이 그저 반복에 의해 흘러가는 글래스의 음악은 어쩌면 이런 면에서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끔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듯하다.

내면과 연결된 작업은 톰블리의 말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어떤 그림들에서는 그저 본능적으로 이뤄집니다. 마치 신경계와 같아요. 설명이 되지 않죠. 그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작업과 함께 느낌이 일어납니다. 선은 느낌입니다. 부드러운 것에서부터, 꿈꾸는 듯한 느낌, 딱딱하거나 건조한 느낌, 외로운 무언가, 무언가의 끝, 또는 시작의 느낌까지”라고 말한다.

내면과 맞닿아 어린아이의 영혼으로 돌아간 듯한 톰블리, 화려한 멜로디와 리듬으로 음악을 채우기보다 단순한 반복으로 군더더기를 걷어낸 글래스. 그 단순한 선과 선율에서 뻗어 나오는 삶의 모습. 삶이란 그렇게 반복적이면서도 그 안에서 일어나는 수 많은 감정들을 겪으며 그렇게 변화화 변형, 변태를 거쳐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들의 작품에서 본질에 다가선 예술을 본다.

“나는 내가 뭘 하는 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모르는 상태야말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필립 글래스) 노엘라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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