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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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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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도덕경에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 즉 ‘하늘 그물은 성겨서 엉성해 보이지만 하나 놓치는 게 없다’는 문구가 있다. 하늘의 법은 관대해 보이지만 악인은 반드시 벌을 면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인과의 촘촘한 사슬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문득 이런 협소한 뜻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최근에 삶을 반추하다가 문득 서머셋 몸이 쓴 ‘인간의 굴레’라는 책이 생각났다. 20대 때 읽어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제목이 유달리 이전부터 뇌리에 남아 있었다. 필자의 삶을 보니 박사 과정 입학만 해놓고 현업 일을 하겠다고 은행에 들어갔지만 1년 있다가 지점 생활이 너무 재미없어서 은행 내의 연구소로 옮겼다. 공부보다는 현업을 해보려고 택한 길이었는데 다시 연구소로 온 것이다.

여기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나니 IMF 외환위기가 와서 미래에셋자산운용으로 직장을 부득이 옮겼다. 거기에서 생각지도 않게 채권운용 CIO를 맡게 되었고, 그때부터 현업에서 12년을 일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또 갑자기 은퇴연구소로 발령을 받아 9년을 근무하게 되었고 퇴직 후에는 책 저술, 강의, 칼럼 쓰기 등을 하고 있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책 보고, 글 쓰고, 강의하는 연구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필자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대부분 우연이었다. IMF 외환위기도 우연이었고 미래에셋으로 들어가게 된 것도 정말 우연이었다. 전 직장 동료가 전화가 와서 권유한 게 계기였다. 은퇴연구소도 생각지 않은 것이었다. 이 각각의 사건들은 예상치 않은 것이었고, 무작위(random)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들 무작위가 모여서 삶의 흐름이 나타났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삶의 큰 물줄기를 타고 온 느낌이었다.

10년 전에 명리학과 주역에 밝은 사람이 우리 모임에 있는 사람들의 아호를 지어주었다. 우리를 처음 보는 데도 신상을 물어보는 것도 없이 그냥 얼굴 한번 슬쩍 보더니 호를 써 내려갔다. 그때 필자가 받았던 아호가 함장(含章)이다. 주역에 나오는 단어이지만 그냥 뜻 자체를 본다면 글을 머금고 있다는 것이다. 그 호를 보면서 ‘내가 연구소로 발령받더니 이제 연구소에 계속 있어야 하는 팔자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이후 줄곧 연구소에 있었고 회사를 퇴직한 후에도 연장선상의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일이 재미있다. 그러니 주말에도 쉬지 않고 나오게 된다.

삶을 돌아보면 사람은 중간에 온갖 임의적인 일들이 의미 없는 충격처럼 다가오지만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것 같다. 필자는 연구 분야를 벗어나보려고 박사 과정에 입학을 해 놓고도 은행에 들어갔지만, 연어가 고향으로 돌아오듯, 다시 연구 분야로 돌아오게 되었다. 요즘은 책을 쓰자는 출판사도 많고, 칼럼은 계속 쓰고 있고, 강의도 많이 한다. 묘하게 이쪽 일은 끊이지 않고 들어온다. 하지만 다른 방면으로 길을 모색하는 것은 조금의 틈도 열리지 않는다. 누가 그 길을 막고 서 있는 것처럼. 손오공의 부처님 손바닥처럼, 열심히 이런저런 길을 모색했지만 삶의 큰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을 갖는다.

필자는 모눈 무늬 그래프로 우주의 중력장을 그린 그림을 즐겨 본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중력에 따라 공간이 휘어져 있다. 아마 중력장을 볼 수 있는 생물체가 있다면 공간이 미세하게 휘어져 있는 걸 볼지도 모르겠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이 물체는 중력장의 휘어짐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를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그물의 곡면 때문에 굴러가는 것이다. 인간의 삶도 중력장 위에 놓인 물체 같다는 생각을 한다. 보이지 않지만 출렁이는 중력장의 그물 위에 놓인 인간의 삶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하늘의 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 주인공은 태어나면서 다리를 전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삶의 여러 질곡들을 겪지만 자신이 살아 온 삶들의 사건들이 별로 의미 없다는 걸 깨닫고 삶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듯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의미 없는 삶의 무수한 사실들이 삶의 무늬를 짜게 되는 것을 보았다. 삶의 또 다른 굴레를 본 것이다. 삶에서 무작위의 사건들이 패턴(무늬)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삶의 무늬는 가장 단순한 무늬 즉 태어나고,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죽음을 맞는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서머셋 몸이 본 ‘인간의 굴레’는 하늘이 쳐 놓은 그물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게 바로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도. 이 책을 다시 한 번 봐야겠다.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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