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율
소리가 지워진 방에 정오가 가득 차올랐습니다 뱉지 못한 하소연처럼 커튼의 레이스 무늬들이 아래부터 흔들립니다 창가로 모여든 햇살은 쓸모없이 반짝거리고 나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자라고 있습니다 늦가을이 되어서야 겨우 꽃 한 송이 피우려는 듯 철지난 진달래의 입술이 파르르 떨립니다 가끔씩 바람에 휘어지는 분홍이 수줍습니다 잊혀진 이름들과 무심한 먼지가 모여드는 구석에서 나를 알아봐 줄 오후를 기다립니다 흙냄새 나는 꽃삽은 일기장에 넣어 두었습니다 침대 위에 내려앉은 정오, 발끝에서 작아지는 그림자를 열어봅니다 입을 닫고 울먹이는 아이가 보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 분홍들이 서랍 속에서 바글거립니다
본명: 김현
2022년 《시와편견》 등단
동인시집 『물결무늬 종소리랑』 외 6권(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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