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희, 데뷔 40주년 기념음반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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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희, 데뷔 40주년 기념음반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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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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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도 가수 데뷔 계획
 
  “가시나 쪼깐한 게 건방지게 노래 잘하네.”
 1967년 당시 최고의 작곡가이던 이봉조가 17살 정훈희(57·사진)의 노래를 듣고 처음 던진 말이다.
 서울 남대문 인근 호텔의 나이트클럽. 여름방학을 맞아 부산에서 상경한 정훈희는 나이트클럽 악단장이던 작은 아버지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하고 있었다.
그때 부른 노래가 줄리 런던의 `러브 레터(Love Letter)’. 당시는 20~30대 미8군 가수들만 팝송을 부를 줄 알던 시절이다.
 클럽 옆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던 이봉조는 노래 소리에 이끌려 클럽을 찾았고 여고생이 부르는 재즈풍의 발라드에 반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색소폰 연주곡으로 발표했던 `안개’의 LP를 건네며 “집에 가서 멜로디를 외워오라”고 했다. 2~3주 뒤, 이봉조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인 탓에 야간 녹음을 하기위해 순경을 앞세우고 정훈희를 데리러 왔다. 정훈희는 처음 찾은 스튜디오에서 신성일, 윤정희 주연 영화 `안개’의 주제곡인 `안개’를 릴테이프에 녹음했다.
 “일단 KBS, MBC, 동아방송에 보내기 위해 데모 음반으로 세개의 릴테이프에 녹음했어요. 릴테이프는 복사가 안되잖아요. 방송 3사에 갖다줬는데 테이프 쟁탈전이 벌어졌대요. PD들이 빨리 취입하라고 아우성이어서 며칠 만에 다른 노래를 10곡 더 녹음해 재킷 사진도 못 찍고 첫 음반을 냈어요. 40만장이 팔렸죠. TV는 동네에 한 대, 피아노는 구에서 한 두 대, 200만~300만원이면 집 한 채를 살 때였는데 전축 없는 사람들도 음반을 샀다는 얘기죠. 전 진짜 신데렐라였어요.”
 그리고 어느새 40년이 흘렀다. 정훈희가 40주년 기념 음반이자 1978년 `꽃밭에서’ 이후 30년 만의 독집인 `40th 애니버서리 셀러브레이션스(Anniversary celebrations) 정훈희’를 8일 발표했다.
 음반에는 윤명선이 작곡한 타이틀곡 `삐삐코로랄라’, 정훈희의 장남이 피처링한`러브 이즈(Love is)’, 인순이와 듀엣한 `노 러브(No love)’ 등의 신곡 8곡과 `안개’, `꽃밭에서’ 등의 히트곡, 오리지널 버전의 `무인도’와 작곡가 고(故)이영훈의 `사랑이 지나가면’까지 총 13곡을 담았다.
 최근 정훈희는 흘러간 30년에 대해 “결혼해 아이 키우는 동안 기획사 시스템이 자리잡은데다 음반을 만드는데 억대가 들어가는데 함께 한 팬들은 중년이 되니 음반을 사지 않더라”며 “`꽃밭에서’가 30년에 걸쳐 히트한 덕에 간간히 젊은 가수들 음반에 참여하거나,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방송에만 출연했다”고 운을 뗐다.
 서구적인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정훈희는 1시간반에 걸쳐 솔직한 입담으로 옛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안개’ 이후 `빗속의 연인들’, `그 사람 바보야’ 등 부르는 노래마다 히트했어요. 한 곡이 1년씩 사랑받았죠. 너무 어린 나이에 인기와 돈이 한꺼번에 오니까 주체할 수 없었어요.”
 1970년대 도쿄국제가요제, 아테네국제가요제, 칠레국제가요제 등 국제가요제에서만 6번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스웨덴 출신 그룹 아바가 데뷔 초기 참여해 빈손으로 돌아간 `제1회 도쿄국제가요제’에서 정훈희가 `베스트 10’과 `가수상’을 동시 받은 것은 30년이 지나도 회자되는 일화다.
 시련도 한순간에 찾아왔다. 1975년 대마초 파동이 연예계를 강타했고 정훈희도 연루됐지만 당시 연예인 중 유일하게 훈방 조치됐다.
 “칠레국제가요제에서 상을 탄 1975년은 천국과 지옥을 오간 해입니다. 당시 제가 담배를 피웠는데 의혹만 있어도 잡아가던 시절이었어요. 지금은 머리카락 검사라도 하지만…. 그런 물결에 휩쓸리면서 6년간 방송정지를 당해 노래를 못했죠.”
 이후 그는 미국에서 그룹 활동을 하다가 귀국한 두살 연상의 가수 김태화와 1979년 결혼했다. 김태화는 올해 봄 25년 만에 음반을 내기도 했다.
 “1970년도에 태화 씨를 처음 봤고 시민회관에서 같이 공연한 기억도 있어요. 1979년 미국에서 귀국해 저에게 `작업’을 걸어왔죠. 우리는 결혼식 안하고 그냥 살았어요. 살아보고 결혼하자는 개방적인 생각이었죠. 1983년 첫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한 스포츠신문에 `미혼모 정훈희, 아들 낳았다’고 크게 보도가 됐어요. 지금은 아들이 둘인데 장남은 지난해 10월 군에서 제대했죠.”
 정훈희는 젊은날의 자신을 `신문물을 일찍이 받아들인 여자’라고 표현했다. 여고생 때 데뷔했으니 또래들 학교 다닐 때 자신은 세계지도를 들여다보고 다녔다고 한바탕 웃음도 터뜨렸다.
 신문물을 흡수할 환경을 만들어준 사람은 일제시대 빅터레코드를 통해 음반을 취입할 정도로 노래 실력이 대단했던 아버지 정근수 씨. 아버지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 5남1녀 중 다섯째인 5~6살짜리 정훈희를 데리고 다녔다. 한국영화에서 남녀가 키스하는 시늉만 해도 `페이드아웃(Fade-out)’이 되던 시절이다.
 “미군 부대에서 팝송을 불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재즈, 팝, 블루스를 들으며 자랐어요. 그래서 노래하는 스타일도 미국적이었죠. 아버지는 ’프리티 리틀 걸`라고또박또박 발음하는 영국식 발음이 아니라, ’프리리 리를 걸`이라며 미국식 발음을 가르쳐줬죠.”
 정훈희는 두 아들도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했다. 가수 제이는 정훈희의 바로 위 오빠의 딸이기도 하다.
 그는 “두 아들 이름이 김대한, 김민국인데 모두 가수의 꿈을 키우고 있다”며 “장남은 발라드를, 올해 입대할 둘째는 록을 좋아한다. 장남은 올해 안에 가수로 데뷔할 예정이다.난 며느리도 직업을 이해해줄 수 있는 가수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음반에서 그는 한가지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바로 작곡가인 고(故) 이영훈이 세상을 떠 음반 작업을 함께 하지 못한데 대한 안타까움이다.
 “이영훈 씨의 음반 ’옛사랑`을 작업하며 만나 40주년 음반을 작업하기로 했어요.
 암이 발병했을 때 ’나 기다린다. 가면 안돼. 내 음반 해주고 가라`고 그랬죠. 그런데 결국 못 일어났어요.”
 현재 대한가수협회 수석 부회장인 정훈희는 선후배 가수들의 가교 역할에 대한 애정도 무척 컸다. 소설가 이외수가 가사를 쓴 김태화의 곡 `마스크’에서 이름을 따와 4개월 전 경기도 일산에 라이브 클럽 `마스크’를 오픈했고 현미, 최백호, 이은하등 동료 가수들에게 무대를 제공하고 있다.
 “음향 시스템에 신경을 많이 쓴 무대에서 선후배들과 함께 노래할 수 있어서 기뻐요. 제 또래가 가교 역할을 하지 않으면 대가 끊어질지도 모르잖아요.”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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