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경희궁 홍화문’굴욕 사진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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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경희궁 홍화문’굴욕 사진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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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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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이 공개한 1930년대 사진 4점 중 박문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큰 문에는 `경춘문(慶春門)’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토 히로부미에 바쳤던`비운의 문’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이토 히로부미의 영혼을 위로하겠다며 만든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돼 `비운의 문’으로 불리는 경희궁 흥화문의 굴욕을 전해주는 당시의 사진이 박문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함께 3·1절을 앞둔 23일 공개됐다.
 사진 수집가인 정성길(68)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이 공개한 1930년대 사진 4점 중 박문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큰 문에는 `경춘문(慶春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원래 이 문은 경희궁의 동쪽에 세워졌던 흥화문이었지만 일제는 우리 민족을 욕보이듯이 지금의 장춘단 공원 자리에 이 문을 옮겨 세우고 1932년 박문사를 완공했다.
 `경춘문’이라는 명칭은 이토 히로부미의 호인 춘무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제는 박문사가 들어선 언덕도 춘무산으로 불렀다.
 장춘단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때 전사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고종이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일제는 1919년 이곳에 벚나무를 심어 공원을 만들고 제사를 못하게 했으며 결국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까지 이곳에 만들었다.
 박문사는 대한민국의 건국이후 헐렸지만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 등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미 일제에 의해 경희궁이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구세군 회관 등이 들어선 상태여서 원래 위치에 복원하지는 못했다. 원래 흥화문 터에는 표지석만 놓여있다.
 당시 일제는 박문사를 건립하면서 흥화문 뿐 아니라 숭례문에 연결된 서울성곽이나 광화문의 석재를 비롯해 여러 문화재급 건축물에서 건축자재를 빼가 대거 사용했다는게 정 관장의 설명이다.
 정 관장은 “박문사나 경춘문의 의미를 되새겨 볼때 지금 시대에서는 경춘문의 경은 경사 경(慶) 대신에 서울 경(京) 정도로 쓰고 박문사의 사도 절 사(寺) 대신에 제사 사(祀)를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구/김장욱기자 gimju@h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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