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들은 시간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시(時)의 뜻을 가진 접두어 `chron’의 어원에 그 편린이 있다.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레아를 비롯하여 12티탄 신족(神族)이 났다. 그 12티탄 중 막내가 크로노스(CRONOS)다. 크로노스는 누나인 레아와의 사이에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 제우스 들을 낳는다. 크로노스는 지배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레아와의 사이에서 얻는 자식을 낳는 족족 먹어버린다. 그런데 막내인 제우스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제우스의 어머니 레아가 기지를 발휘하여 크로노스에게 돌을 먹임으로써다. 살아난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제거하고 그가 삼킨 형들을 토해내게 만들고는 올림포스의 주신(主神)이 된다.
하늘인 우라노스와 지구인 가이아를 부모로 한 크로노스가 하늘 아래 땅을 딛고 살면서 자식을 삼킨다는 건 시간의 속성을 상징한다. 시간은 땅에서 태어난 모든 것을 데려간다는 것, 즉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게 자연의 이치라는 메타포다. 신화의 은유는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크로노스는 제 아비 우라노스를 낫으로 제거했는데, 우라노스의 정기(精氣)가 바다에 떨어져 거품이 되고 이 거품 속에서 미의 여신 아프로티테(비너스)가 탄생했다. 미인뿐 아니라 모든 존재 자체가 원초적으로 거품이라는 암유(暗喩)다. 불교의 `색즉시공’이나 `제행무상’ 사상과 통하는 말이다.
시간이 뭔지는 알 수 없어도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그 무엇이란 막연한 생각을 다시금 갖게 하는 섣달그믐이다. 크로노스란 이름의 아버지가 자식에게 생명을 주었다간 죽음을 통해 그걸 도로 거두어 가듯이 인간존재를 잠시 허여했다가 이내 부정해버리는 시간은 무엇이며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올 한해 스러져간 유한생명의 절대권력자들, 카다피 빈라덴 김정일 같은 이름들의 의미는 또 무엇인가. 끝도 갓도 없는 의문과 허무감에 무연히 휩싸이면서 다시 호미곶 너머 불잉걸처럼 뜨겁게 솟아오를 임진년 새해도 함께 그리는 제석의 `시간’이다. 정재모/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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