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 고려어 어휘 353개를 들어 설명하는 항목 중에 `霜露皆曰雪(상로개왈설)’이란 게 있다. 서리와 이슬 모두 `설’이라 이른다는 뜻이다. 여기서 설(雪)은 뜻을 취한 글자가 아니라 음을 빌리려고 사용한 글자다. `서리’의 맨 뒤 모음 `l’를 제거한 음과 `이슬’의 맨 앞에 붙은 모음 `l’를 제거하면 남는 음은 각각 `설’과 `슬’이 된다. 이 둘이 같은 말이라니,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르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같은 음운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모음첨가 현상으로 약간 달라졌지만 말이다.
이처럼 고려어의 편린을 살짝 엿보게 해주는 계림유사는 널리 알려져 있듯 고려 숙종 8년(1103년) 서장관 신분으로 사신을 따라왔던 북송(北宋)의 손목(孫穆)이 편찬했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9백여 년 전의 우리 선조들이 이슬과 서리를 같은 말로 불렀다는 걸 증언한다. 달리 말해 고려인들은 그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인식했던 거다.
이 같은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과 과학적 이해가 없다면 사람들은 `이슬이 얼어붙은 것이 서리’라고 생각하기 십상일 거다. 물론 이런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건 `서리’가 아니라 `동무(凍霧)’라 부름으로써 엄격히 구분한다. 고려 때 혹은 그 이전에 우리네 선조들은 이슬과 서리가 같은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오늘이 마침 가을절기를 상징하는 날, 흰서리가 맺힌다는 절기, 1년 24절기 중 열다섯 번째인 백로(白露)다. 그래 생각이 닿아 끼적여 보는 이슬 관련 한담(閑談)이거니와 이슬과 서리가 생성원리상 동일한 것임을 이미 알았던 우리네 선조들의 자연과학 지식수준이 새삼 놀랍다.
정재모/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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