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화의 계절
  • 정재모
등화의 계절
  • 정재모
  • 승인 2012.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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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과 독서를 이야기할 적에 보통 떠올리는 낱말이 등화가친(燈火可親)과 신량등화(新凉燈火) 같은 사자성어다. 전자는 등불과 친할 만하다는 뜻으로, 가을밤은 등불 아래서 독서하기 좋다는 말이다. 당나라 시인 한유(韓愈)가 아들에게 독서를 권하며 지은 `부독서성남시(符讀書城南詩)’란 시구에서 유래했다. `가을이 되어 장마도 걷히고/서늘한 바람은 마을에 가득하다./이제 등불도 가까이 할 수 있으니(등화초가친:燈火稍可親)/책을 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간편가서권:簡編可舒卷;)’ 후자 역시 초가을의 서늘한 기운 아래 등불을 밝힌다는 말이니 그 말이 그 말이다.
  등잔불과 독서는 실과 바늘처럼 붙어 있을 때 성어가 되는 것 같다. 중국 명나라의 구우(瞿佑)가 지었다는 소설집 `전등신화(剪燈新話)’란 책 제목에도 `등’이 들어갔다. 이 제목은 `심지가 불에 타 그을음이 나므로 잘라버리고 새 심지를 밀어 올려 가면서 읽는 새 이야기’라는 뜻이다. 또 등불을 켤 기름이 없어서 진나라의 차윤(車胤)이 반딧불로 글을 읽고 손강(孫康)은 눈빛에 비추어 읽었다는 고사도 결국은 독서와 등불 이야기다.

  기생이 열녀전 끼고 다니기를 좋아한다는 속담상황처럼 겉멋이라도 내고 싶은 걸까. 가을만 되면 독서이야기 들먹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 호미곶자도 그런 부류의 한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가을만 되면 무슨 연례행사 치르듯 독서이야기 한 마디를 해야만 넘어가게 되는 건 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까. 아니 `책을 읽어야 하리라’는 일말의 부담감만큼은 가진 때문이리라. 지난여름, 일주일 휴가 때 읽었노라며 열권도 넘는 글로벌신간 제목 주워섬기던 친구에게 내심 주눅들어하면서 또 한 번 `독서의 계절’ 맞는다.
  이번 주 초 모진 비바람 지나고 나더니 하늘이 사뭇 높아지고 깊어졌다. 밤이 낮 시간보다 길어지기 시작한다는 추분이 내일이다. 다음 주엔 또 추석연휴가 들었다. 유별난 더위 끝에 올라온 두세 차례 태풍 겪고 보니 어느새 가을의 한복판에 서게 된 것이다. 요즘 같은 중추(仲秋)의 이모티콘은 누가 뭐래도 삼경(三更) 깊숙이 가득한 찌르륵 풀벌레 소리와 더불어 등잔불 심지 돋우며 독서하는 정경이다. 이 가을엔 욕심 부리지 말고 딱 한 권만이라도 읽자. 제목만 알고 평생 펼친 적 없는 책 중에서 제일 두꺼운 것으로 우선 한 권만 골라 읽어내자. 
 정재모/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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