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 내 한국 이름 외치며 응원할 때 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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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 내 한국 이름 외치며 응원할 때 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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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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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준,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 11 출연 화제… 아시아인 첫`탑9’올라

 지난해 미국 폭스TV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 11’에 출연해 화제가 된 한희준(24·사진)은 몰라보게 살이 쏙 빠져 있었다.
 지난 9월 미국에서 데뷔 싱글 `브링 더 러브 백(Bring The Love Back)’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틈틈이 체중 감량을 했다고 멋쩍은 듯 웃었다.
 한희준은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최후 13명이 뽑힌 생방송 경연에 진출해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톱9’까지 올랐다.
 그러나 도니 해서웨이의 `어 송 포유(A Song for you)’를 부른 무대를 끝으로 `톱8’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당시 심사위원인 스티븐 타일러는 기립 박수를 했고 제니퍼 로페즈는 “희준이 여기까지 온 건 우연이 아니다”고 호평했지만 아쉽게도 시청자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희준’이란 한글 이름으로 미국 전역에 눈도장을 찍은 한국인이 됐다. 지난 7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한국의 날’ 행사에 참석해 LA다저스와 신시네티레즈 경기 도중 `갓 블레스 아메리카(God Bless America)’를 열창해 5만 관객의 환호를 받았다.
 싱글 발매를 위해 미국에 머물다가 최근 입국한 한희준과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로스앤젤레스의 아파트에서 살며 싱글을 준비하고 뮤직비디오를 찍는 과정은 무척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라디오 스테이션을 도는 등의 본격적인 프로모션은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내년 3월부터 할 계획입니다”. 앞서 그는 올 연말 국내 방송에 출연할 것이라고 공개했다.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는 싸이 형님이 무척 부러웠다”며 “나의 뿌리인 모국에서 사랑 받아야만 미국에서도 한국 대표 선수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다부지게 말했다.
 1시간 30분 동안 풀어낸 그의 인생은 어린 나이임에도 꽤 파란만장했다.
 그는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농구에 소질 있던 형의 미국프로농구(NBA) 진출을 위해 가족 모두 뉴욕으로 이민을 감행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우리 가족은 LA레이커스를 응원하며 형이 NBA 무대에서 뛰는 걸 상상했어요. 하지만 미국으로 이민 간 뒤 형의 키 성장이 멈추며 절망했죠. 지금은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게 감사해요. 가족애가 무척 끈끈하거든요.” 그는 “우리 가족의 아픔이기도 한 NBA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졌다”며 내년 3월 LA클리퍼스 경기에서 미국 국가를 부른다고 덧붙였다.
 처음 발을 디딘 미국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어머니가 한 영어학습지의 지사장 출신이어서 영어와 친숙했지만 미국 실생활 언어와 괴리가 컸어요. 또 영주권 혜택을 받기 전까지 이민자 신분에서 오는 어려움도 있었고요.”
 뉴욕 퀸즈 플러싱에 살며 초·중·고를 졸업하고 나약대(Nyack College)에 입학한 그는 1학년을 다니다가 학업을 접었다. 공부에는 소질이 없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다른 길을 찾았다는 것.
 그는 2006년 정준호 등이 출연한 한미 합작 영화 `웨스트 32번가’의 출연 기회를 잡았다. 꽤 비중 있는 역할에 오디션으로 붙으며 짧지만 배우로서 미래를 꿈꿨다.

 그러나 영화의 흥행 성적은 좋지 못했고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었던 그는 열여덟 살 때부터 각종 행사의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의 결혼식과 파티를 비롯해 한국 연예인들의 프로모션 사회를 맡으며 이벤트 업계에서 꽤 이름을 알렸다.
 “고교 시절 제 가방에는 교과서 대신 턱시도가 들어 있었어요. 학교가 끝나면 각종 무대에서 사회를 봤으니까요. 토니 베넷, 마이클 볼튼, 제임스 잉그램 등을 좋아해 행사 중간에 노래를 하곤 했는데 한국에서 온 한 음반기획자가 절 보고 가수 제안을 했어요.”
 2009년 그는 한국으로 날아왔고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제대로 노래 한번 불러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 경기도의 반지하 방에 살면서 책 공장 아르바이트를 하며 버텼지만 데뷔 기회는 오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안감이 밀려왔고 MBC `위대한 탄생’에도 도전했지만 탈락하자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다. 결국 2010년 말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집에서 칩거하던 그를 지켜본 사촌형이 장애인을 돕는 비영리 단체 `밀알’에 데려간 게 전환점이 됐다.
 “몸이 불편한 친구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며 반성했어요. 장애인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함께 놀며 제가 햇빛을 받는 느낌이었죠. 그곳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그때 `세상은 열심히 일해 새 신발을 신으라고 하지만, 왜 나는 맨발로 걸어갈 수 있는 발이 있다는 것의 감사함을 몰랐을까’란 깨달음을 얻었죠.”
 장애인 친구들을 통해 마음의 병을 고친 그는 빚을 갚고 싶어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을 결심했다. 도전자들의 사연이 소개되니 단체를 알리고 기부금을 모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더 엑스팩터(The X Factor)’, `더 보이스(The Voice)’ 등에 나갔지만 탈락했고 마지막으로 도전한 게 가장 인기있는 `아메리칸 아이돌’이었다”며 “덕분에 밀알을 미국 전역에 알리며 기부금을 모을 수 있었다”고 웃었다.
 모범생 같은 외모의 그가 들려준 감미로운 음색은 때론 심사위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노래 실력이 우승하기엔 부족하다는 걸 잘 알았다고 했다.
 “10명이 남으면서 제 실력이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끝이 보였고 그날 떨어질 예감도 했죠. 하지만 기부금을 모은 것으로 이미 목표를 이뤘고 나머지는 덤이었기에 미련이 없었어요. 여기서 받은 유명세로 인기를 유지하겠다는 욕심도,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요.”
 그러나 그는 지난 7-9월 `아메리칸 아이돌’ 출연진이 미국 50여 개 도시에서 총 50만 명 규모로 연 투어에 참가하며 무대에서 소름이 돋는 경험을 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내 한국 이름을 외치고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할 때 소름이 돋았다”며
 “나처럼 조명받지 못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며 좋은 영향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다시 노래하고 싶어진 그는 당시 스모키, 어스윈드앤파이어, 뉴키즈온더블록 등의 매니저로부터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 사람과 일하고 싶었다고 한다. 평소 친분 있던 형이 대표인 김범수 소속사의 미국 법인 `폴라리스 USA’와 계약을 맺었다.
 그는 궁극적인 인생의 목표는 한국과 미국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돼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한 힘을 갖기 위해 앞으로 가수뿐만 아니라 배우, MC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제가 동경하는 분이 (미국 석유 재벌이자 자선 사업가) 록펠러를 비롯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토크쇼 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와 엘렌드 제너러스죠. 제가 이분들을 보고 꿈을 키우듯이 누군가도 절 보고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노력할 겁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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