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 정재모] 역사 속에 창림사(昌林寺)란 절이 있었다. 오늘날엔 경주시 배동 남산기슭에 석물 몇 점과 함께 그 터만 남아있다. 전문가가 아니면 존재조차도 아는 이가 많지 않지만 결코 예사로운 절터가 아니다. 여러 기록들로 추측컨대 최소한 원성왕 7년(791) 이전에 건립된 절이라고 한다(두산백과). 전설의 신필(神筆) ‘김생(金生)이 절의 비문을 썼다’는 후대의 또 다른 기록으로 미루어 그렇다. 경주 남산 자락에 있었다는 이 절이 예사로울 수가 없는 까닭은 신라 천년역사와 문화가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는 데 있다.
6촌 촌장들이 어느 날 높은 곳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서기가 돌며 백마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다가가 보매 백마는 승천해버렸고 붉고 커다란 알 하나가 있어 쪼개자 사내아이였다.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다. 나중 그를 왕으로 추대하니 곧 신라 천년역사를 연 박혁거세다. 사람들은 나정에서 멀지 않은 남산(南山) 서쪽 기슭에 궁실을 지어 알에서 나온 성인을 모시니 ‘지금의 창림사다.’라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창림사 삼층석탑이 며칠 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1867호)로 지정됐다. 기단면(基壇面)에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같은 팔부신중(八部神衆)이 돋을새김돼 공예적 가치가 큰 돌탑이다. 1976년 망가진 채로 발견되어 복원과정을 거친 지 근 40년 만에 비로소 대접을 받게 된 셈이다. 그나마 다행이라 않을 수 없다. 이참에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경주 지방 곳곳에 널려 있을 또 다른 ‘창림사지’와 망가진 석탑·불상 같은 미발굴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다. 60~70년대에 나름대로 한차례 훑었지만 촘촘한 발굴과 정비작업을 다시 한 번 펼쳐야 하지 않겠나 하는 거다. 지난 시절에 찾을만한 건 다 찾았노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흙속에 묻혀 있는 문화재는 의외로 많더라는 게 우리가 보아온 문화재 발굴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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