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번 밥상 차리면 하루 끝
자식들 출가 후 편해질 무렵
몸 불편한 남편 간호 나서
‘주부클럽’친구들이 버팀목
조정희의 포항이야기<11>
“하루 15번 밥상을 차리고 나서 누우면 또 내일 아침 상차릴 걱정에 밤새 울었습니다.”
인생이 참 그렇네요. 한줄기 세월이라는 광풍이 휙 불고나니 꿈 많던 여고생이 호호할머니가 돼 있고, 십여 명이 득실거리던 집에 병든 남편과 저만 덩그러니 남아있네요.
영천 안천리에서 1남4녀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어릴 적 집안형편도 괜찮았고 부모님의 교육열이 높아 영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모두 마쳤다. 남동생은 KAIST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은 한의사로 활동하고 여동생들도 모두 대학을 나왔다.
부모님이 모두 사서삼경 등 한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너무 순수하셔서 한번 크게 사기를 당하고는 가세가 갑자기 기울었다.
결국 대구로 이사를 나왔고 생계를 위해 어머니는 직장에 나갔고 아버지도 부동산 관련 일을 했다. 그러던 중 결혼적령기가 되자 아버지는 여기저기 선을 보라고 권했고 실제로 몇 번 중매자리에 나갔다. 그러다가 기북사람 정근재(70)씨와 27살 되던 해 1973년 대구반월당 대구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만 해도 시댁은 기북의 정부자집이라고 해서 상당히 부유했고 일하는 머슴을 몇이나 데리고 있었다. 신랑도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와 포항대학을 마치고 이미 안강 풍산금속에 취직이 확정돼 있어 남 부러울 게 없는 신혼이었다. 그 때만해도 친정아버지는 부잣집에 시집가는 딸이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하지만 보이는 것과 직접 살아보는 것은 판이했다. 시댁은 부잣집이다 보니 식구가 많았고 방도 많았다.
이렇게 밥을 차리고 돌아서 또 식사준비를 하고 파김치가 되어 자리에 누우면 다음날 아침걱정 때문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 때도 많았다.
그런 혹독한 시집살이를 몇 년 하던 중 남편 직장 따라 안강에 방을 얻어 나왔다. 그곳에서 두 아들이 태어났고 모처럼 오붓한 생활을 하는가 싶었는데 남편이 6년만에 직장을 그만 두어 다시 기북으로 들어왔다.
남편이 동네일과 새마을지도자회, 청년회 일에 활발하던 61살 때 뇌경색이 왔다. 이제 좀 편해질 나이에, 자식들도 모두 결혼해 다 떠나고난 뒤 몸이 부자연스러운 남편을 간호하고 모셔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남편은 몸이 불편해 동네 산책하는 것도 어렵고 텔레비전 앞에 종일 앉아 있고 저도 젊었을 때의 가슴앓이가 병이 됐는지 요즘은 신경안정제를 먹고 있다.
오래전부터 주부클럽이라는 봉사활동을 통해 맺어진 친구들이 주위에 있어 큰 버팀목이 된다. 요즘엔 청국장, 메주 조청 만들어 파는 일을 재미삼아 시작했는데 수입도 짭짤해 아직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는 것만도 다행이다. 또 틈틈이 걸려오는 여동생들의 안부전화가 반갑다. “언니가 그 집 기둥이데이~ 기둥이 아프거나 넘어지면 안 되는 기라 힘내라 언니야!”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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