턴테이블 위로 튀어 오르는
  • 경북도민일보
턴테이블 위로 튀어 오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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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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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이수미의 ‘it’s just a short walk!’를 들으며
오성은의 사적인 LP

숭어야, 숭어

지난 주말 나는 독립서점 스테레오북스로 가기 위해 부산 온천천변을 걷고 있었다. 해는 높고, 나무는 푸르고, 천에는 숭어가 날뛰고 있었다. 사실 수면 위로 펄떡 뛰어오르는 물고기가 뭔지 잘 몰랐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라고 말해주었다. 숭어는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을 때는 자취를 감추었다가 포기하면 얼른 튀어 올랐다. 은빛 비늘을 슬쩍 내보이곤 다시 다이빙하는 숭어를 보니, 기억의 조각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한때 나는 TV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거제도에서 숭어잡이를 경험한 적 있었다. 망루에서 전통 방식으로 숭어를 어획하는 일은 도심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이색적인 체험이었다.

물빛의 묘한 변화를 감지한 망루장이 기계식 레버를 당기면 절벽에서 대형 그물이 단번에 쏟아져 내렸다. 산토끼를 잡기 위해 높은 나무에 그물을 친 것 같은 형태라 할까. 한번 그물을 던지면 많게는 몇천 마리의 숭어가 잡히기에 재빨리 선원들이 출동해야 했다. 나도 현장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급히 포구에서 출항하는 배에 올라탔다. 절벽 가까이 다가가자 숭어 떼가 그물을 들썩거릴 정도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선원들은 내게 코를 조심하라고 농을 던졌다. 숭어가 튀어 오르면 사람 코도 박살 낼 정도로 힘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선원 한 분이 숭어 한 마리를 잡아 내게 건네주기도 했다. 나는 두 손 가득 힘을 준 채 숭어를 붙잡았다. 숭어는 정말 힘이 거셌다. 생생한 그 느낌이 지금도 손바닥에 남아 있다.

it’s just a short walk!



나는 스테레오북스에 도착한 뒤 주문해두었던 세이수미의 앨범 ‘it’s just a short walk!’를 구매했다. 스테레오북스는 책뿐만 아니라 귀한 LP 및 CD, 게다가 맥주까지 준비해둔 매력적인 서점이었다. 대표님은 세이수미의 다른 앨범이 다 팔린 걸 아쉬워하면서도 이 앨범만으로도 만족할걸, 하는 표정으로 내게 판을 건넸다. 작업실로 돌아온 나는 스피커 앞에서 조심스럽게 LP를 개봉했다. 투명한 판은 처음이었기에 신선하면서도 숭고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바늘이 소릿골에 닿는 순간, 축 늘어진 사운드에 놀라 바늘을 들어 올리고야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45rpm으로 재생해야만 하는 앨범이었던 것이다. 작업실에서는 주로 클래식이나 재즈를 듣기에 대부분 스테레오타입인 33.3rpm이었는데, 돌연 새로운 속도로 찾아온 이 투명한 판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다시 턴테이블 속도를 조절하자 세이수미만의 밝고 경쾌한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여름밤 해변을 거니는 발걸음 같은 템포라고 해야 할까. 확실히 작업실보다는 야외에서 듣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돌연 바늘이 튀면서 첨벙하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내 귀는 쫑긋 긴장해선 소리의 정체를 더듬고 있다. 묘하게 플랫되며 쳐지는 음정에 한껏 마음을 기대고 있었는데, 첨벙이라니.

일상의 잔잔한 파동

음악을 듣는 동안 달빛 아래에서 잠깐 졸았던 건지도 몰랐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작업실 구석 턴테이블 위에서 무언가, 아주 날렵하고 매끈한, 신선한 것 같기도 하면서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 무언가가 튀어 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 그건 기타의 생생한 튠과 베이스의 편안함, 드럼의 느긋한 템포와 보컬 수미의 매혹적인 목소리의 조화가 만들어낸 세이수미였다. 한동안 내가 잊고, 밀쳐내고, 가둬두고, 모른 척했던 어떤 날 것의 사운드가 생생하게 튀어 오르고 있었다. 카메라의 뷰파인더에는 좀체 들어오지 않을 것처럼 두 눈을 또렷하게 뜨면 사라져 버렸고, 느긋하게 등을 기대어 눈을 감으면 비로소 멋지게 날아오르는 그 정체를 나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온천천변에서 넓은 바다로 뻗어갈 숭어의 이동은 마치 ‘it’s just a short walk!’로 표현되는 여행길 같았다. 이제 나는 그것을 찍거나 붙잡거나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놓아두면 나의 지루한 일상에 튀어 올라 잔잔한 동심원을 그려나가듯 사운드를 퍼뜨려놓을 것이다. 일상에 찾아온 잔잔한 파동처럼 숭어가 뛰어노는 장면을 그리듯 45rpm의 속도로 그들에게 걸음을 내맡긴다. 밤은 끝나지 않았고, 아직은 멈출 생각이 전혀 없다.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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