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 해인 2017년에 생물의 뇌와 유사하게 시행착오를 통해 이치를 깨닫는 강화학습 시스템(reinforcement learning system)이 적용된 ‘알파고 제로’가 만들어졌고, 이 ‘알파고 제로’는 불과 70시간의 학습 후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를 100대 0으로 완승을 거둬 세간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인간이 이룩한 지식의 도움 없이 30시간 만에 독학으로 학습하는 ‘알파 제로’의 등장으로 ‘알파고 제로’를 거뜬히 추월해 버렸다. 이처럼 새로운 인공지능이 기존의 인공지능을 능가해 버리는 인공지능발전의 추격 릴레이가 이어지며 세상을 거듭 놀라게 하고 있다.
알파고, 알파고 제로, 알파 제로 등 인공지능의 발전은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수준으로 그것도 비약적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휴머노이드 AI 로봇 ‘소피아’부터 로봇 개 ‘스팟’, MS?페이스북?구글 등 IT 공룡들이 자연어처리 분야에서 선점을 위한 경쟁으로 만든 ‘GPT-3’은 인간처럼 대화하며 스스로 익힌 코딩으로 앱을 개발하거나 시와 소설 같은 문학 작품을 쓰고 있다. 또한 양날의 검인 안면인식 ‘딥페이크’와 같은 기술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이번 대선에는 이미 AI로 합성한 ‘딥페이크’ 영상이 대통령 선거에 활용되고 있다. 발성부터 입 모양, 눈썹, 근육 움직임까지 그대로 구현해 가짜 뉴스와 흑색 선전에 악용의 여지가 있어 최근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불법 처리되는 법이 만들어진 상황이다.
우리 삶에 인공지능이 넓고 깊게 들어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인공지능은 여러 영역에서 탁월한 문제 풀이 능력을 보이며 큰 기대와 우려, 다양한 논란을 낳고 있다. 근대에 들어와 인류는 문제 풀이에 경도되어 정답 신화에 빠졌다. 현대 기술의 발전은 인류가 가지고 있던 크고 작은 문제의 해결을 의미했고, 기술을 통한 문제 풀이의 매력에 매료된 인간은 문제풀이의 답을 찾는 인재를 길러 왔고 인공지능 기술로 그 문제에 답을 해결하게 하고 있다.
과거의 기술이 인간의 육체 노동이나 기억, 계산 같은 역할을 대체했다면 인공지능에 대해 우려하는 결정적 이유는 “인간을 대신해 판단과 배움의 능력을 대체한다”는 점이다. 판단과 의사결정은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인간이 제시하지 않은 자료로 학습한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해 판단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봐야 한다. 10의 171제곱수의 바둑의 경우의 수를 고작 30시간 내에 학습하는 ‘알파제로’에게 우리 삶의 결정적인 순간을 맡긴다면 우리는 과학과 기술을 지금처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는 안된다.
과학과 기술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면 과학과 기술을 개발하기 앞서 우리는 수 많은 질문을 선행해야 한다. 자연의 생태계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 채 무비판적으로 진행된 기술 진보의 행위는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를 전 선로 위에 달리게 하는 행위와 같다.
따라서 우리는 수학과 과학에 매진하는 만큼 철학과 인문학적 고민의 시간을 교육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철학과 인문학적 소양이 문과의 전유물이 아니라기술을 발전시키는 이공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좋은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담론이 필요하고 더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을 토대로 인공지능의 개발, 사용, 관리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답을 찾는 인공지능을 만들기 앞서 인간은 “인공지능의 사용을 누가 결정하고, 어떤 기준으로 허용 또는 금지할 것인가?” 질문하고 논의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 인공지능이 기존의 편견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불완전한 데이터를 학습해서 편향적인 결론을 내리는 경우를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인공지능의 사용을 통해 인간의 인지나 판단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되는 경우를 막기 위해 필요한 장치는 무엇인가? 인공지능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은 누가져야 하는가? 제품을 만든 회사인가? 이용자인가? 법과 규제를 소홀히 한 국가의 책임인가?
답을 찾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질문하는 인간으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손화철 교수의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겠다.
“목적이 이끄는 기술 발전이란 특정한 기술을 개발할 때 그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이유가 아닌 그 결과가 ‘좋다’는 것을 우선한다는 의미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을 개발하기보다는, 우리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이는 훨씬 더 크고 깊은 물음, 즉 우리가 원하는 인간과 사회의 모습은 무엇인지, ‘좋은 기술’의 ‘좋음’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의 물음을 제기한다.”(손화철, 『호모 파베르의 미래』)
박종대 경북새희망교육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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