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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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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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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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맑은 아침, 좁은 도랑을 끼고 걷는다.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냇물은 제 무게를 덜어내고 맑은 음색으로 흐른다. 공중에서 서핑 중인 나비는 온몸으로 음표를 그리며 리듬을 탄다. 산책하는 발걸음이 구름처럼 가볍다.

허밍은 입을 다물고 부르는 노래이다. 소리를 세게 내면 무겁고 둔탁해지니 가볍게 숨을 내보내듯 불러준다. 크게 울리지 않고 가사를 읊을 수 없으나 특수한 음색효과를 얻을 수 있어 합창에서 많이 쓰인다. 1초에 80번 이상 날갯짓하며 꿀을 먹는 벌새를 허밍버드라 부르고 팽이가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도 허밍이라 한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 인생을 가볍게 살 것인가, 무겁게 살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게 된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주장하며 다시 태어나도 같은 삶을 살 것이기에 가볍게 살라 했고, 기원전의 파르메니데스는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라고 일렀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것은 모두 가벼워 보인다. 잎은 벌레에 갉아 먹힐 것을 염려치 않고, 배부른 벌레는 새의 부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좁은 돌 틈에 자리 잡은 질경이도 주어진 환경에 충실하게 살아갈 뿐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버거운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이는 인간뿐인 듯하다.

멀리서 허밍 코러스가 들려온다.

푸치니의 나비부인에 나오는 허밍 코러스는 미묘하게 불안하고 왠지 모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게이샤인 주인공은 미군장교를 만나 결혼했지만 남편이 미국으로 돌아가 버린다. 울새가 둥지를 트는 계절이 되면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었던 그녀는 3년 동안 홀로 아이를 키우며 기다린다. 어느 날 밤, 드디어 남편이 탄 배가 항구에 들어온다. 그러나 끝내 그녀를 찾아오지 않는다. 주인공의 심정은 참담하게 무너져 내리고 항구에서는 선원들이 부르는 허밍이 들려온다.

엄마가 파킨슨 진단을 받은 지 몇 년이 지났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어렵고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있다. 이성이 빠져나간 자리를 본능이 채우며 점점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중이다. 남의 손에 맡기지 않고 돌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남은 생이 얼마인지 알 수 없기에 가끔 아득해지기도 한다.

건강은 예전 같지 않고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어깨가 무겁다. 얼마 남지 않은 남편의 정년과 퇴직 후 살아내야 할 긴 시간을 생각하면 초조해진다.

혹등고래의 허밍이 가볍게 파도를 넘는다.

매년 8,000㎞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하며 전 세계에 퍼져 사는 혹등고래는 가장 다양한 음색을 가지고 있어 마음의 위로나 안정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주 들려준다고 한다. 깊은 바다의 물살을 온몸으로 익힌 노래는 마치 사람의 언어처럼 높낮이를 가진다.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긴장했던 마음이 느슨해지고 어느새 나도 그 곁에서 가볍게 파도를 넘는다.

흔히 우리는 가벼운 것을 공기에 비유하곤 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무게를 정확한 수치로 매겨놓았다. 헬륨 풍선이 하늘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은 그보다 가볍기 때문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것만큼 우리 내부에서도 공기를 밀어내기에 무게를 느끼지 못할 뿐이다. 레일 위를 떠가는 자기부상 열차와 공중을 가볍게 뛰어오르는 체조 선수는 자신의 무게를 버리는 방법을 이미 터득한 고수라 할 만하다.

한번 주어진 삶은 소중하므로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기쁨도 있지만 극복해야 할 고난도 많다. 짜인 시간표대로 살아가다가도 일탈의 느슨함이 필요할 때가 있다. 조금은 덜 치열하고 덜 경쟁적으로 살아도 삶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으리라.

후에 엄마가 돌아가시면 눈을 맞추며 간간이 나누던 대화가 그리울 것 같다. 아이들에게 아직은 손길이 필요하던 그때가 나의 바비레따였음을 떠올릴 것이다. 정년이 오기 전 그래도 사회에서 활동하던 남편의 한때가 자랑스러우리라. 어차피 내려놓을 수 없는 무게라면 욕심과 걱정을 덜고 가볍게 살 일이다.

연못에서 잉어들이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다.

코로나가 세상을 장악했던 근래, 모두 마스크를 낀 채 거리를 두며 생활했다. 그동안 우린 내면의 세계를 무시한 채 너무 타인 지향적으로만 살아왔는지 모른다. 쓸데없이 많은 말을 하면서 살았기에 코로나가 입에 재갈을 물린지도. 이번 기회에 소란했던 것들을 버리고 스스로 안으로 침잠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싶다.

느릿느릿 꼬리를 저으며 잉어가 움직인다. 물고기는 지금 온몸으로 노래를 한다. 소리 나지 않는 허밍으로. 나비부인은 허밍을 들으며 끓어오르는 격정을 가라앉히고 점점 평정을 되찾았으리라. 젊은 날 불치병을 얻은 친구는 남겨진 삶을 선물처럼 여기며 즐겁게 살고 있다. 무겁다는 건 덜어낼 수 있다는 것이고 결국은 가벼워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갈맷빛 저수지 수면 위로 뭉게구름이 유유히 흘러간다. 구름도 지금 허밍 중이다.

이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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