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타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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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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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 소리 보채지 않는 아침이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한 잔의 물로 알약 몇 개를 집어삼킨다. 매일 새벽 현관 밖에서 노숙하는 신문을 안으로 들여다 놓고 라디오를 켠다. 이파리만 무성한 화분에 물 한 모금씩 먹인다. 조급할 것도, 딱히 해야 할 일도 없는 그저 그런 날을 시작한다.

아침 일곱 시, 단체로 연두색 조끼를 입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얼굴을 꽁꽁 싸맨 여자들이 도로 위를 걸어온다. 병사들처럼 한 손엔 쓰레기봉투를 다른 손엔 집게를 들었다. 열대야를 건져 올린 듯한 아침 햇살을 피해 집 앞 건물의 손바닥만 한 그늘에 여름 풀꽃처럼 앉아 있다. 곧 본격적으로 한낮의 더위가 시작될 텐데, 아랑곳이 없다. 얼음 몇 조각 띄운 매실차를 그들에게 건네주고 멋쩍은 웃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들어온다.

오늘처럼 여유로운 아침이 좋다. 물먹은 솜같이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내 자리 하나를 지키려 달음박질하던 때가 있었다. 한계치 없이 몰아치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작 나 자신을 돌보는 법은 알지 못했다. 자기 계발이라는 미명에 아등바등하며 종일 뭔가에 쫓기듯 초조한 나날을 보냈다. 때가 되면 하나둘 오는 개나리재스민처럼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좋다.

민병도 시인의 「오직 한 사람」이라는 시조를 좋아한다. ‘세상의 모든 꽃이/ 내 것일 필요는 없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내 편일 필요도 없다∥ 눈 감고 서로를 보는/ 너 하나도 너무 많다∥ 마음에 욕심이 생길 때마다 암송해본다. 다른 사람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투영될까 전전긍긍하던 때가 있었다. 내 의도와는 다른 허수아비 오류를 범한 사람으로 인해 가슴 퍼렇도록 상처받기도 했다. 다 내 편일 필요 없다, 그 명쾌한 해답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언어학자이며 사회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사람들이 빠르고 풍족한 욕망보다 불편하더라도 적당히 나누고 소박하게 사는 삶이 더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한다. 라다크의 사람들이 빈약한 자원에도 정서적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유지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 역설한다. 삶에서 어떤 가치를 지켜야 하는지 화두를 던져주는 책이었다.

나는 결혼 후 여러 해 동안 주위 사람들이 결벽증이라 할 만큼 씻고 닦았다. 여덟 달도 못 채우고 미숙아로 태어난 아들이 잘못될까 노심초사였기도 했지만, 아예 집을 멸균하듯이 청소하며 진을 빼기 일쑤였다. 아이의 옷에 혹여 물방울이라도 튈라치면 바로 갈아입히고 유별나게 까탈을 부렸다. 집으로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조차 꺼렸고 자발적 격리를 당했다. 초조와 불안증으로 오랫동안 불면에 시달려야 했고 내 가슴은 한 소절의 노래에도 숨 쉬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설렘도 옅어지고 미움도 희미하다. 밀물에 떠밀리듯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던 때에는 아이와 남편을 들먹이며 설렜다 미워했다 조증과 울증을 수시로 오가며 자신을 괴롭혀댔다. 이제 봄의 찬란했던 시간도, 먹구름 뒤에 숨어서 나를 꾸짖던 폭풍 같던 시간도 모두 지나고 설렘도 미움도 차분해졌다. 크고 작은 여러 풍파를 겪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웬만큼 면역이 생겼을까. 인정되지 않는 다름에 사리를 따져가며 전처럼 뇌동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설렘이 없어진다는 건 서글픈 일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정적인 고요가 더없이 좋다.

제주도에 자생하는 제주왕나비는 자체 살충 성분으로 꽃가루를 먹고 사는 곤충이다. 애벌레일 때 박주가리의 잎을 먹고 독성물질을 체내에 축적하며 자란다. 그 독은 천적을 중독 마비시킬 수도 있어, 새들도 감히 나비를 공격하지 못한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기에 커다란 날갯짓으로 화려한 몸짓을 자랑한다고 한다. 어쩌면 나도 제주왕나비처럼 산 건 아니었을까. 혼자만의 아집을 뾰족하게 뭉쳐 안으로 숨기고 타협하지 않을 수만 가지 핑곗거리를 내장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도 함부로 얕잡아보지 못하게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워 몸집을 부풀리고 살아온 건 아닌지 새삼 뒤돌아보게 된다.

요즘의 나는 물처럼 살아가려 한다.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나만의 길을 소리 없이 흐르려 내 안을 다독인다. 끝맺음 못 할 일은 애당초 시작하지 않고 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가볍게 살아보려 노력한다. 좀 더 높이 올라서려 굽 높은 힐에 발가락 곧추세우고 나 자신을 몰아세우던, 홍역을 앓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둘러싼 환경의 제약과 헐렁해진 모자람은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산꼭대기에서부터 물길 거스르지 않고 유유히 흐르는 저 강물처럼. 더 가지려 다툴 일도 잘 보이려 치장할 일도 없는 질박한 지금이 좋다.

나이 육십, 인생 2막이라 했던가. 봄을 견디고 폭풍 같았던 여름을 건너 이제 내 삶도 처서로 접어든 가을과 같다. 국화와 단풍이 절정에 들고 서리가 내리는 상강도 그리 멀지 않았다. 타던 햇볕이 식어가는 9월, 강변 바람길에 은빛 억새는 석양에 핑크빛으로 물들어 모로 누워 익어간다.

어제와 오늘을 펼쳐놓은 내 삶도 도돌이표 없는 선율에 맞춰 연주된다. 나만의 칸타빌레로. 김지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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