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계고와 능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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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계고와 능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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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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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학교-노동시장 이행 국면에서 ‘고졸자’의 위치는 짧은 기간에 급격하게 바뀌었다. 1990년대 초에만 해도 20대 초반 청년 10명 중 8명은 고등학교 졸업으로 공식 제도 교육을 마쳤다. 이들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것은 대학에 못 가서일 수도 있지만, 굳이 대학에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중 상당수는 ‘직업계’ 고등학교 졸업생이었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전체 고등학생의 40% 이상이 직업계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이들의 상당수는 졸업 직후에 취업했다. 남성은 주로 제조업체에 들어갔다. 여성은 일부는 제조업체에 일부는 서비스업체에 들어갔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남성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다수는 취업 직후에, 또는 약간의 결혼 자금을 마련한 후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렸다. 여성은 많은 경우 다양한 곳에서 짧게 일을 하다가 결혼·출산과 함께 노동시장에서 퇴장했다. 이런 식으로 이른바 ‘근대가족’을 꾸렸다.

불과 10여 년 만에 고졸자는 다수자에서 소수자가 되었다. 고졸자의 대학 진학률은 1990년 30% 초반대에서 2005년 약 80%로 15년 만에 50%p 이상 증가했다. 10년 전이었으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시장에 바로 진입했을 이들 상당수가 전문대학이나 대학에 진학했다. 결국 15년 만에 전체 고등학교에서 직업계 고등학교의 비중은 절반가량 줄었다. 그럼에도 적은 수는 아니다. 2020년 4월 기준(교육통계연보) 직업계 고등학교로 분류되는 학교는 전체 2,367개 고등학교 중 24.3%로, 4개 중 1개다. 학생 수는 대략 28만 명으로, 동일 연령대의 약 4분의 1에 해당한다. 졸업자는 전체 고등학교 졸업자 50만여 명 중 9만여 명으로, 약 18%에 해당한다. 물론 여기서 대학에 진학한 이들을 제외한 순수한 고졸자의 수는 더 적다. 오늘날 이들은 ‘고졸 비진학 청소년’으로 불린다.

청년의 다수가 대학생이 되어 갔던 교육 팽창 국면에서 맞닥뜨린 1998년 경제위기는 2000년대 중반 이래 실업을 키워드로 한 청년 담론(“88만원 세대”)이 등장하게 된 계기였다. 이후 청년에 대한 사회적·정책적 관심은 부쩍 커졌다. 그런데 커진 관심의 자리에 고졸자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청년 담론의 주체는 대학생이었다. 직업계 고등학교 졸업자의 70% 가까이가 대학에 진학하던 2000년대 중후반에 청년은 곧 대학생인 것이 자연스러웠다. 2000년대 중반 이래 고졸자의 존재는 사회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고졸자가 사회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죽음을 통해서였다. 2010년대에 ‘현장실습생’의 죽음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고로 죽거나 자살로 죽는 사례가 알려졌다. 이후 실습 현장의 열악성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이들의 죽음에 주목한 이들은 2008년에 들어선 이명박 정부 이래 직업계 고등학교 졸업생의 취업을 강조하는 분위기를 배경으로 꼽았다. 현장실습제도를 비판했고, 이명박 정부가 취업률로 학교를 줄 세운다고 비판했다. 직업계 고등학생의 위치가 열악하다는 점을 부각했다.

이들의 열악한 위치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언론은 열악하다는 것만 강조할 뿐 이들이 처한 위치의 역사적·사회적 맥락은 드러내지 않는다. 죽음이 강조되면서 사회적·정치적 논의의 범위는 현장실습제도 운영의 문제로 좁혀졌다. 정부도 과거 대책을 포장만 바꾼 채 제시할 뿐 이들의 삶에 대한 종합적인 진단은 하지 않는다. 학계는 여전히 직업교육 강화만을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지난 30년은 한국사회에서 고졸자의 지위가 지속적으로 하락해 온 과정이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1997년의 경제위기였지만 하락의 추이는 그 전에 시작되었다. 고졸자의 지위하락은 교육이 급격하게 팽창하는 추이와 노동시장이 급격하게 위계화되는 추이가 맞물려 나타난 결과다. 경제위기 직후 중년 남성의 실업에 가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청년은 2000년대 중반부터 실업자로 인식되었고, 이 무렵부터 취업 정책 드라이브가 본격화된다. 경기 악화와 대졸자 규모가 정점을 찍는 추이에서 고졸자의 취업률이 강조된 결과는 고용의 질 하락이다. 이것을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의 탓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그 전부터 하락 추이는 시작되었고, 문재인 정부에 와서도 고용의 양과 질이 나아졌다는 보고는 없다. 일관된 고졸자 지위의 하락세에서 직업계 고등학교 정책은 2010년 이후에 그 의미를 대부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직업계고 졸업자는 점점 더 게토화된 노동시장에 진입하거나, 진입을 유예하고 있다.

‘교육’이나 ‘취업’이냐 사이에서 강조점은 다소 바뀌었지만 기본적으로 직업계고 교육 정책은 졸업자들의 근로 조건이나 사회적 대우를 간과한 기업 위주의 인력 정책에 종속된 것이었다. 그 인력 정책이라는 것도 생산 구조 변화와 기술 발달에 대비한 미래 지향적인 것보다는 경쟁력이 떨어지거나 기피하는 사양 직종에 인력을 투입하는 것에 가까웠다. 실업과 불안정한 일자리 문제에 대한 해법은 언제나 학생들의 숙련 강화나 교육 프로그램의 질 강화 등 교육의 몫으로 돌려졌다. 개인의 선택과 노력의 문제로 돌려졌다. 이러한 의미에서 직업계고 정책은 다수의 청소년을 질서에 순응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바뀐 것은 이름뿐이다. 공고와 상고에서 실업계고로, 실업계고에서 전문계고로, 전문계고에서 특성화고로 이름이 바뀌었다. 최근에는 ‘직업계고’로 통칭된다. 여기에는 대안학교를 제외한 직업계열 특성화고와 마이스터고(특수목적고등학교의 일종), 일반계고 중 직업계열학과가 포함된다. 이름만 보면 직업계고가 더 전문적인 곳으로 변화한 것 같지만 어쩌면 이름 바꾸기는 직업계고의 가치 하락을 말로나마 만회해보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고졸자의 길은 대학 진학의 경로와 다른 길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고졸 경로는 대학 진학 경로보다 못한 위치로 자리 매겨졌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직업교육에서 ‘직업’을 강조하냐, ‘교육’을 강조하냐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어느 쪽이든 서열화된 교육체제에서 경쟁 논리를 강화할 뿐이다. 경쟁 논리가 강화되면 결과에 대한 책임은 (기회가 있는데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한) 개인에게 부과된다.

고졸자의 지위 변화는 한국사회의 교육의 의미를 묻는다. 한국에서 교육은 지위 경쟁의 수단이다. 의미가 있는 것은 (절대적) 사용가치가 아니라 (상대적) 교환가치다. 그렇기에 특수교육이 아닌 일반교육이 강조된다. 그동안 고졸자의 지위를 옹호하기 위해 사용된 논리는 ‘학력(벌)에서 능(실)력으로’였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능력 담론은 고등교육 팽창을 낳았고 그 과정에서 일원화된 교육 위계 체제는 능력 담론이 구체화되는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능력을 강조한 직업계 고등학교 정책은 역설적으로 능력주의 담론에 의해 낙인을 얻었다. 이러한 점에서 고졸자의 지위 하락은 한국사회의 급격한 교육팽창 과정의 빛과 그늘을 동시에 보여준다. 낙인은 ‘고졸자’를 줄였다. 동시에 고졸자의 지위는 더욱 하락했다. 능력주의의 논리로 직업계고 교육에 의미 부여를 하는 시도는 효과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능력주의 사회로의 전환이 역설적으로 능력주의를 전제로 한 고졸자 지원 정책의 효과를 반감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사점은 교육 일반으로도 확장할 수 있다. 직업계고 정책의 실패는 직업교육, 나아가 여전히 기회의 평등만을 강조하는 한국 교육에 새로운 전환 논리를 요청한다.

이상직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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