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상서좌승 사기경(謝幾卿)은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해 주변에 친구가 많았다. 도연명과 더불어 남북조시대의 대표적인 산수시인(山水詩人)으로 불리는 사영운(謝靈運)의 증손자이기도 한 그는 증조부의 저항 은둔적 기질을 닮았던지 중신이면서도 조정의 규정에 별로 구애받지 않았다. 그가 어느 날 일행과 술판을 벌었다. 술자리가 얼마나 요란했던지 구경꾼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마구 마셔댔다.
별것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는 이 일을 사가가 기록한 걸로 봐서 당시 그의 호주방탕(豪酒放蕩)이 세상의 화젯거리였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 같은 그의 행동을 언짢게 여긴 무제가 지방토벌에 실패한 그의 죄를 물어 벼슬자리를 내놓게 했다. 고향집으로 돌아와 친구와 어울려 자유분방한 생활을 마음껏 즐기면서 덮개가 없는 수레를 타고 시정(市井)을 누비다가 취하면 방울을 흔들며 상여소리를 내지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세상의 물의(物議)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서(漢書)는 적고 있다.
저축은행영업정지 무마청탁과 함께 3억9000만원을 받은 김재홍 전 KT&G이사장이 그제 항소심 재판에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말했다. 대통령부인 김윤옥 여사의 사촌오빠다. 마치`별것 아닌 사안으로 사람들의 입질에 오르내린 게 부끄럽다’는 투였다. 하지만 판사로부터 “물의가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물의란 말로 얼렁뚱땅 `죄세탁’ 하려다 서울고법 성기문 부장판사에게 딱 걸린 거다. 그러고 보니 공인이라는 사람들이 뇌물 받아먹거나 공금 훔쳐 먹다 들킨 마당에 언론이 마이크 들이대면 한결같이 `물의 일으켜 죄송’ 운운 하는 게 언제부터인가 정형화된 말뽄새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 안 되듯 제아무리 예쁜 말을 끌어다 붙여도 범죄는 범죄일 뿐, 세탁될 순 없다. 그걸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우면 죄 짓지 말 일이다. 정재모/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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