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분열증 환자’ 강렬함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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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분열증 환자’ 강렬함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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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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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크림슨의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들으며 
▲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경북도민일보]  △턴테이블 위의 검은 우주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음악을 들으면 될 것인데 굳이 손이 많이 가는 LP가 간절해지는 날이 있다. 한 곡의 음악을 듣기에 세상은 너무 편해졌고, 한 곡의 음악을 잊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날로그 방식으로 재생되는 이 요상한 물체는 편하지 않아서 오히려 여운이 길게 남았다. 어떤 때는 시간마저 되감아버리기도 했다. 아티스트가 호흡하던 그날, 그때, 그 순간의 공기와 온도와 습도가 고스란히 압축되어 환생을 기다렸다. 타임머신이라고 해야 할까. 검은 우주라고 불러도 좋을 신비한 세계가 내 방 안에서 서서히 팽창하고 있었다. 나는 먼지 덮개를 열고 턴테이블을 작동시켰다.
 턴테이블 위의 검은 우주가 시계방향으로 회전했다. 톤암의 뾰족한 바늘은 우주의 한 공간에 무사히 착륙했다. 한 점의 인류가 무한한 우주를 넘보듯 무모하면서 대담했다. 바늘이 긁어대는 마찰은 전류를 통해 스피커로 전달되었다. 스피커는 전류를 진동으로 바꿨다. 높고 낮은, 강하고 여린 진동이 공기에 스몄다. 진동은 사방으로 흐르다, 내 몸에 닿았다. 그 순간 진동은 귓바퀴를 따라 몸속에 흡수하여 세포들을 두드렸다. 주파수에 민감한 세포들이 서둘러 진동의 정체를 뇌로 전달했다. 이제 거꾸로 뇌는 진동을 전류로 바꿀 것을 명령했다. 전류는 핏줄을 타고 감각을 긁어댔다. 어느새 턴테이블 위를 돌던 검은 우주는 몸속을 흘러 다녔다. 
 △킹 크림슨의 등장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 발자국을 찍었다. 사뮤엘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로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여전히 비틀즈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롤링 스톤즈가 왕좌의 자리는 무시한 채 새로운 락큰롤 부대를 만들고 있던 때였다. 68년 5월의 사회변혁 분위기는 좀처럼 시들지 않았고 히피문화가 자라나 우드스탁이 번져나갔다. 중심과 주변의 경계가 흐려지고 무너지고 전복되었다. 그리고 그 해 4월, 킹 크림슨이 나타났다.
 기념비적인 앨범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의 수록곡은 ‘21st Century Schizoid Man’, ‘I Talk To The Wind’, ‘Epitaph’, ‘Moonchild’,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이었다. ‘21세기 정신분열증 환자’나 ‘묘비명’ 같은 강렬하면서도 도전적인 제목은 프로그래시브 락의 기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앨범에는 ‘21st Century Schizoid Man’이 들어있지 않았다. 겁에 질린 채 오른쪽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 동굴처럼 큰 콧구멍, 그보다 더 깊은 목구멍, 펼쳐진 입술, 비뚤한 이, 맥락 없는 주름을 가진 이 남자의 얼굴. 배리 고드버(Barry Godber)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그린 역사적인 앨범 커버도 없었다. 분명히 1집 노래들이 담겨 있는데, 앨범 커버는 3집인 ‘Lizard’의 표지였다. 내가 가진 것은 정식으로 수입된 앨범이 분명했다. 하지만 킹 크림슨의 색깔이라 할 수 있는 첫 번째 곡과 앨범커버가 지워진 채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누군가 의도적이고 작위적으로 킹 크림슨의 앨범을 편집해두었다. 킹 크림슨의 존재를 편집했다. 편집자는 다름 아닌 검열체제의 감시에 열을 올린 국가, 대한민국의 1970년대 풍경이었다.
 △21세기 분열증 환자
 나는 턴테이블을 멈추고, 인터넷을 통해서 누락된 ‘21st Century Schizoid Man’을 들어보았다. 고양이의 발, 강철 발톱, 시인은 굶주리고 아이들은 피를 흘린다는 절규, 아니 냉소, 21세기 분열증 환자라는 강렬한 외침. 몽환적이면서도 중독적인 기타 리프에 머리가 절로 움직이고, 머릿속의 뇌는 이리저리 흔들렸다. 강렬한 밴드 사운드에 색소폰이 덧붙어 즉흥적인 재즈처럼 들리기도 했다. 해를 거쳐 멤버를 교체하고 전 세계의 순회공연을 다니는 킹 크림슨이지만 그들의 색깔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앨범이 있어서였다. 락 앨범이 검열의 대상이 되었던 건 결국 정치적인 이유이겠지만 그보다 본질적인 까닭은 사람을 뜨거워지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킹 크림슨은 극도로 차갑게 노래를 만들어냈고 턴테이블 위의 검은 우주는 차분하고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금세 온몸이 뜨거워졌다. ‘21세기의 분열증 환자’가 50년 전에 만들어진 노래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인류는 여전히 달 이면을 꿈꾸고,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린다. 비상식적인 검열이나 블랙리스트가 실재하고 분열증 환자는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렇기에 킹 크림슨 역시 존재한다. 킹 크림슨은 가장 진보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지만 결코 미래를 노래하지 않는다. 진보는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의 진단이다. 검고 둥근 킹 크림슨이라는 우주가 오늘도 턴테이블 위에 올라가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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