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그런 목소리가 있다
그런 목소리가 있다. 볕도 바람도 소용없이 조용히 내면을 바라보게 되는. 일찍이 빌리 홀리데이가 그랬다. 어느 날에는 쳇 베이커가 무심한 듯 지독하게 다가왔다. 비가 오는 날에는 김광석이, 바다 앞에서는 이소라가 마음을 두드렸다. 이들은 귀를 할퀴지 않았다. 몸을 짓이기지도 않았다. 그저 내 안을 살피다 돌아갔다. 어느 때고는 허락 없이 며칠을 머무르기도 했다.
그런 목소리도 있다. 무엇이든 피어오르게 만드는. 미소도, 향기도, 사랑도, 행복도. 꽃을 피우는 건 봄이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봄을 닮은 목소리, 당신을 닮은 목소리.
제임스 테일러가 내게 왔다. 나는 오래도록 스피커 앞을 떠나지 못했고, 좀처럼 묘한 기분에 와인을 한 잔 마셔야만 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가 처음으로 기타를 안았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어떤 목소리를 가지고 싶었던 것일까. 그 감정을 기억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 그날의 공기와 온도와 날씨를 점친 뒤라도 결코 간단치만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열다섯 살 나의 감정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미 세상에 물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를 물들인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그러다보면 나를 지배한 세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나를 물들인 건 오직 당신의 목소리였다. 당신을 물들인 건 나의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나와 당신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 이후로 인류는 타락이 아닌 진보로 나아갔다. 한 철학자는 고귀한 의식에서 비천한 의식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목소리의 성취라고 부르고 싶다. 그 성취의 행진에 깃발을 든 사내가 있다면 나는 제임스 테일러의 얼굴을 떠올려 보겠다. 그가 히피를 통과한 포크 가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래도록 마음의 병을 앓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는 우울도 행복도 가늠할 수 없는 보통의 소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나를 온통 물들인 건 그저 보통의 목소리들이었다.
△나는 당신의 친구다
△보통의 하루
나는 <JT>의 마지막 수록곡인 “If I keep my heart out of sight”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그가 네 번이나 잇따라 말하는 I love you라는 주문이 연약해보여서일까. 더없이 강해 보이려는 그 마음이 애처로웠던 걸까. 아니면 연약하고 애처롭지만 기어코 해내는 그 사랑의 고백에 응원을 보내고 싶어서일까. 통기타의 여린 아르페지오와 섬세한 터치, 건반의 맑은 톤과 정직한 드럼은 소박하지만 세련된 조화를 이룬다. 특히 전주와 간주에서 흘러나오는 화려하지 않은 기타 솔로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연주보다도 아름답다.
하지만 제임스 테일러가 말하듯 그 어떤 것도 전부는 아니다. 목소리도, 멜로디도, 기타의 연주도, 그가 불러냈던 세월의 흔적도. 음악은 단지 이곳에서 저곳으로 흘러가는 공기일 뿐이다.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만질 수 없지만 즐길 수 있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다정한 보통의 공기일 뿐, 무엇도 아니다.
와인 잔은 어느새 비어 버렸고, 턴테이블은 회전을 멈추었다. 제임스 테일러의 목소리는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보통의 하루가 흘러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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