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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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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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가던 카페가 문을 닫았다. 많게는 일주일에 서너 번, 적어도 한두 번은 들러 여러 계절을 함께 보냈던 아담한 가게다. 집에서 5분 이내로 갈 수 있는 거리라 조금 걷는 것도 좋았다. 이 층인 카페는 4차선과 맞물려 있지만 커다란 창으로 햇살이 들어와 아늑하고 포근했다. 겨울에 접어들면 주인이 직접 만든 대추차가 인기였다.

단골을 정할 땐 몇 가지를 염두에 둔다. 유리창에 얼룩이 있거나 식물이 마른 경우는 일단 제외한다. 가게에 들어섰을 때 주인의 뜨뜻미지근한 반응도 곤란하지만 과한 환대도 부담스럽다. 세련되지는 않아도 깔끔해야 함은 말할 나위 없고 그만의 특별함이 느껴지면 합격이다. 기준을 통과하면 자연히 골수 단골이 되고 그때부터 다른 곳은 잘 쳐다보지 않는다.

남편이 총각 때부터 드나드는 식당이 있다. 규모는 작지만 이용하는 사람이 많고 근 삼십 년을 왕래하다 보니 정이 든 모양이다. 지나는 길에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일부러 찾아갈 때가 더 많다. 토박이들이 모여 동네 소식을 주고받거나 서로의 경조사를 챙기고,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는, 일종의 사랑방이다.

오래 살기 위해서는 슬리퍼를 신고 찾아갈 수 있는 단골집이 있어야 한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정확한 맥락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마음을 여는 편한 장소는 스트레스를 줄여준다는 의미로 해석해본다. 단골집에서 자주 막걸릿잔을 들던 남편을 조금 느슨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웃집 젊은 댁이, 평소 이용하는 편의점 주인이 자꾸 아는 체를 해서 그만 다녀야겠다고 말한 걸 들은 적이 있다. 단골이라 자신의 정보를 너무 많이 알게 되어 행동반경이 좁아진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단골이라 해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시인은 ‘카페나 와인 바, 식당이나 서점, 목욕탕과 운동장, 꽃집 외에 좋아하는 작가, 가수, 습관들을 자신의 구석진 단골’이라 불렀다. 어쩌면 살아가는 일은 단골을 만드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몰랐던 공간이 익숙해지고 낯선 느낌이 친숙해지는 과정이 바로 단골이 되는 것이리라. 단순히 이름을 기억하고, 사는 곳을 알며, SNS 친구가 되는, 그런 관계는 아닌.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플로리안은 수많은 예술가의 단골 장소였다. 괴테와 바이런을 비롯한 문인, 바그너와 브람스를 포함한 음악가, 화가 마네와 모네 등 손꼽기 어려울 정도였다. 헤밍웨이는 쿠바에 머무는 동안 ‘라 보데기따’의 단골이었다. 이 술집에서 그는 모히또를 즐겨 마셨다. 『노인과 바다』의 주 무대가 되었던 바닷가 마을에도 단골 식당이 있는데 그가 즐겨 앉았던 모퉁이 자리는 그 이유로 착석이 금지되어 있다.

오랫동안 다녔던 카페는 남자들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술 한잔하며 게임도 할 수 있는 장소로. 이제 그곳은 누군가의 단골이 될 것이다. 나는 새로운 단골집을 찾아 나섰다. A카페는 도보로 15분쯤 걸리지만 널찍하여 빈자리가 많다. 덕분에 회전율에 신경 쓰지 않아도 좋지만 주인이 너무 자주 말을 걸어온다. B카페는 일찍 문을 닫고 폐점 시간이 다가오면 힐끗거리며 눈치를 준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C카페는 늘 붐비는 곳이라 목록에서 지웠다.

저녁 무렵, 커피 한잔을 들고 놀이터 단골 의자에 가 앉는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자리엔 참새들만 남아 떨어진 과자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있다. 공기는 부드럽고 주변은 적막하여 평화롭다. 들고 간 책을 무릎에 펼쳐놓고 읽는 둥 마는 둥, 눈길은 산책 나온 강아지 뒤를 졸래졸래 따라가 본다. 풀 냄새도 맡고 가끔은 영역표시도 하며.

자주 문을 열고 들어가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은 가게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카페 분위기며, 주인의 다정함이며, 드나드는 손님의 성향이며 그런 것들을 다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초와 난초의 사귐이라는 뜻으로, 벗 사이의 높고 맑은 사귐을 이르는 지란지교는 벗이든 카페든 마찬가지로 해당하는 말이리라.

오늘도 단골을 찾아 발품을 판다. 저기 골목 모퉁이 새로 생긴 카페는 어떨까? 노란 꽃 한 송이가 반짝이는 간판을 보며 서둘러 발길을 옮긴다.

이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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