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대안이라는 관성 혹은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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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대안이라는 관성 혹은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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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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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정책대안’이란 단어가 과용되며 긍정적 역할만 있는 것 같지 않다. 학위과정 때는 이론이나 경험적 근거로 책임질 수 없는 대안이나 제언은 말을 아끼라 훈련받았다. 졸업 후 연구기관에 근무해보니 연구자의 미덕이 바뀐다. 처음부터 연구를 발주한 부처나 정치세력이 문제해결의 방향을 제시하면, 연구자는 그에 맞는 분석과 대안, 상세한 입법안이나 정부 정책을 쓰기도 한다.

어차피 연구가 진공의 공간에 이루어지지 않고 현실을 다루는 이상 불가피한 부분도 있다. 연구자는 실무자의 네트워크를 통해 현장조사를 하거나 개인 연구자가 얻기 어려운 상세한 정부 정책을 알 수 있다. 국회나 정부 부처, 사회단체에서 일하는 이들은 전문가의 지혜를 빌려 정책추진에 도움을 얻을 수 있으니, 서로 협력하면 공익에 기여하는 경우도 많다. 어쩌면 한국에서 추진되는 괜찮은 정책의 상당수가 그런 과정에서 탄생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연구 주제나 학문의 성격, 분석의 한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모든 보고서에 ‘대안’이나 ‘과제’를 강제해 오히려 연구 가치를 떨어뜨리는 내용을 덧붙이게 부추기지 않는지 의문이다.

사실 수년간 해당 연구를 지속하며 관련 정책에 대한 다방면 폭넓은 이해가 있지 않은 한 유의미한 대안을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입법이나 새로운 제도를 제시하려면 또 하나의 별도 연구로 수행해야 할 경우도 많다. 그런데 대다수 연구기관이 분석 이후 정책대안이나 과제를 써 연구의 활용도나 실용성을 높이도록 유도하고 중요 평가의 항목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많은 기관의 연구들은 정책과 입법대안을 자신하지 못하면서도 습관처럼 쓰곤 한다. 현실기반이 없는 뻔한 이야기, 좋은 말만 나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필자 역시 그런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엉성한 내용’을 끄적인 적이 있다.

어차피 현장에서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허술한 대안’은 잘 활용하지 않기에 사회에 미칠 해악도 크지 않으리라. 다만 연구 수준을 높이고 사회 기여도를 높이겠다는 기관의 형식?기준이 오히려 학자의 글을 가볍게 만들고 스스로의 규범을 무너뜨리지 않는지 고민해 볼 일이다.

나아가 한국의 너무 많은 입법안, 특히 급증하고 있는 ‘특별법’의 존재가 보고서나 연구의 정책대안을 남발하는 풍토와도 관계가 있진 않을까 싶다.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매일매일 수건에서 수십건의 다양한 의제를 다루는 토론회가 열린다. 국회라는 공간의 특성상 사회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모여 논의를 거치는 것은 긍정적이다. 사실 국회에서 논의되는 연구들은 괜찮은 내용들이 많다. 그런데 토론회 발제문이나 활용하는 연구의 결론은 상당수는 입법을 주장한다. 특별법 제정을 내세우는 경우도 많다.

사실 아무리 뛰어난 연구라도 특정 분야의 한계를 뛰어넘기란 쉽지 않으며 문제제기와 분석이 훌륭하다고 효과가 있는 좋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력이 길고 다방면 지식을 습득한 연구자라도 온갖 분야 쟁점과 현실 세계를 모두 알기 어려우며, 예산과 정책 구조, 입법 흐름, 법률안을 둘러싼 정치과정을 일일이 파악할 수는 없다. 제도가 실제 현장에서 효과를 발휘하려면 다른 정책이나 법률과 정합성을 가질 수 있도록 다층적인 검토, 단건의 제도가 아니라 정책패키지에 대한 설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연구를 발주한 발주처나 연구기관에서 뭐라도 당장 써먹을 내용을 가져오라니, 이 모든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손쉬운 방법으로 특별법을 제언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정말 현행 법률을 검토해 법률의 개정이 아니라 반드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생각해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일까. 문제는 국회가 과도하게 입법 경쟁을 하며 심사가 부실해졌고 특별법의 발의와 제정도 그만큼 많아져서다. 17대 국회에서 325건 정도 특별법이 발의되었지만, 20대에는 1275건, 21대 국회에서도 이미 1000건을 넘어 21대가 끝날 때쯤이면 특별법만 2000건이 발의될 가능성이 높다. 가결 건수도 급증해 17대 국회부터는 100건을 넘어서기 시작했고 20대 국회에서는 231건, 21대 국회에서만도 152건이 가결되었다. 시급히 대처해야 하는 대형 재난이나 사고 등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는 특별법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역 민원성 예산의 특별법, 기존 법률을 잘 개선해서 활용하기보다 논의와 심사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며 제도의 효용성을 떨어뜨리는 특별법이 남발된다는 비판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효과가 불분명하거나 기존 법제도와 충돌하는 설익은 제도들이 만들어지는 데에 연구가 ‘정책대안’이란 이름으로 공모하는 경우도 발생하기 쉬워졌다.

이 연구 결과는 잠정적이며, 해외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줄 뿐이고, 이 연구가 추후 대안의 효과나 결과, 정치적 동력까지 전부 책임질 수 없단 조심스럽지만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는 연구자 외에 대부분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인도 공무원도, 그리고 언론도 종종 그래서 대안이 뭐냐고 묻고, 그렇게만 하면 바뀌냐고 묻는다. 파당적 사실을 필요로 하는 정치세력, 바뀐 정권의 입맛에 맞추려는 공무원일수록 생각을 절제하고 판단을 유보하는 연구자에게 원고나 자문을 요청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분야의 전문가였나 싶게 갸우뚱한 사람이 관료나 정치조직과 긴밀히 결합하며 발언권과 힘을 얻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이 ‘정책대안’ 때문에 발생하는 일은 아니다. 다만 ‘정책대안’이 정말 우리 사회의 대안이 되는지 고민해볼 일이다.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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