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락(獨樂)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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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獨樂)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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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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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물빛 싱그러운 여름이다. 한때 머무르다 지나간 모란이 마당 한 편에 약속 같은 열매를 남겨놓았다. 수백 년을 건너온 저 팽나무를 보라지. 쏟아지는 햇살에 초록 이파리를 지붕으로 이고, 관절마다 옹이를 달았다. 고목에 도깨비가 살림집을 차렸다. 그 속에 작은 풀꽃과 곤충들도 터를 잡았다. 산새들이 제집이듯 드나든다. 산 아래로 내려온 햇살이 도깨비 살림집을 엿본다.

경주 옥산서원 독락당 안에는 오랜 시간을 넘어온 수묵의 바람이 머문다. 심연의 고요함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외로움 같기도 하다. 독락당은 조선 시대 회재 이언적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해 지은 별장이다. ‘어진 선비도 세속의 일을 잊고 자신의 도를 즐긴다’는 독락당獨樂堂. 독락은 혼자서 즐긴다는 뜻이다. 일상생활에서 마음이 소란할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독락당을 찾는다.

독락당을 찬찬히 둘러보면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다. 조선 시대 판서였던 이가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거처했던 곳이어서일까. 학자의 정갈했던 성품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독락당 계정에서 내려다보이는 자계천을 흘러가는 강물 소리가 책 읽듯이 낭랑하다. 초여름 조곤조곤한 오후 햇살이 대청마루에 걸터앉는다. 서쪽의 자옥산에서 내려온 산바람과 동쪽의 강바람이 번갈아 오가며 방객의 눈꺼풀에 마법을 건다. 마루 기둥에 기대앉아 물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깐의 겉잠을 즐긴다.

독락을 위해선 혼자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 혼자 산다’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독립하여 혼자 사는 연예인들의 일상생활을 보여준다. 나는 지금껏 자식으로 부모로 또 아내로 늘 종종거리며 일인다역의 역할로 살았다. 나를 돌보는 시간은 애당초 없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원격조정 당하며 늘 바쁘게 움직이는 일상이었다. 수십 년간 같은 공간에서 가족과 함께 패키지처럼 쫓기듯 살아가는 내게 그들의 삶은 일면 부럽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해넘이에 쫓기지 않고 마음껏 게으를 수 있는 즐거움을 꿈꾼다.

얼마 전 지인이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고 돌아왔다. 가족들과 떨어져 작은 가방에 옷가지 몇 벌만 들고 떠났다. 갱년기와 함께 우울증을 호소하던 그는 낯선 곳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매가리 없이 축 처져 말대답조차 귀찮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여태껏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게 미안하다고 했다. 무기력해 보였던 얼굴에 홍조와 함께 목소리에 활기가 넘쳐 보였다. 다음번엔 울릉도 한 달 살기를 해볼 참이란다. 아마도 혼자 여행하면서 내면을 들여다보며 스스로 즐기는 방도를 찾은 모양이었다.

모처럼 경주 남산 달빛 기행에 참가했다. 허구한 날 일에 치이고 감정에 치여 분주했던 일상을 털고, 고즈넉한 산길을 걸었다. 초저녁 하늘에 행성 하나가 유별스레 반짝거린다. 밤하늘을 올려다본 게 언제였던지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산꼭대기에서 골짜기로 부는 산바람이 귀밑 솜털을 간질인다. 저절로 살몃살몃 미소가 지어진다. 황금빛 노을이 다 숨기도 전에 동쪽 능선 일천바위 위로 창연한 빛의 살결이 솟아오른다. 산등성이를 내려온 서늘한 보름달이 우중우중 선 남산의 키 작은 소나무를 살며시 안는다. 달과의 재회가 깊어지고 고요한 달빛 아래 산중의 고요도 깊어진다.

보물인 경주 용장사지 삼층석탑의 풍모가 당당하다. 억겁의 모진 풍파에 예전의 품은 아닐지나 산 중턱 바위 벼랑 위에 호젓이 선 자태는 가히 일품이다. 보름 달빛이 탑의 옆구리로 비껴들어 부서진다. 느슨하게 불어오는 실바람은 묵언의 탑돌이를 한다. 절 마당을 벗어나 무한한 공간에 두 손 모으듯 오롯이 선 석탑, 아마도 이생의 낙樂을 바라는 어느 석공의 기도였을 것이다.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바위를 깊게 파서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바위를 깎아서 마애불 부처를 모셨다. 마애불은 흔히 바위 속의 부처를 찾아낸 것이라 하는데, 불곡 마애여래좌상에 꼭 들어맞는 말인 것 같다. 대좌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장삼 자락 늘어뜨리고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고 있는 감실 부처는 볼수록 인정 많은 할머니 모습이다. 초여름 보름달이 감실에 시나브로 든다. 붉은 연꽃 장엄莊嚴을 어깨에 두르고 달빛에 스미는 마애불의 그윽한 묵상은 아마도 독락의 경지가 아닐까.

결혼한 후부터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차안대를 한 경주마처럼 앞만 보며 살았다. 어릴 적 외갓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가졌던 감정을 조우할 때마다 가족 주위에 울타리를 단단히 쳤다. 낯선 환경이 내 아이들의 감정을 해코지하지 못하게 밤낮 지키느라 애가 달았다. 막상 큰일이 생기면 맞서 해결할 주제도 못 되면서 환갑이 다되도록 걱정을 만들어 이고 지고 용을 썼다. 그 때문에 장성한 아이들은 물론이고 나조차도 대밭 속의 바람처럼 울타리 안에서만 머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독락당 계정 아래 자계천에 옥빛 맑은 하늘이 내려와 멋스러움을 더한다. 구부정한 곡선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무심히 흐르는 강물이 경을 읽는 듯하다. 진정한 독락은 자연과 더불어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낙樂을 만들어가는 것이리라. 강물이 자신의 길을 만들며 유유히 흘러 바다로 향하는 발걸음처럼.

김지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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