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그는 그렇게 살다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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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그는 그렇게 살다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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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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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초기사장 재직시절 박태준(맨 오른쪽).
 
 
1973년 6월 9일 포스코에서 첫 쇳물이 쏟아지는 것을 지켜보며 만세 부르는 박태준(가운데).
 
1976년 5월 31일 박정희 대통령과 포항제철 2고로에 화입식을 하는 박태준(두번째줄 오른쪽).
 
  `철강 불모’ 한국, 글로벌 철강사로 성장시켜
   제철보국·우향우 정신은 포스코인 가슴에 남아
   포스코 주식 한 주도 갖지 않는 `무욕의 삶’ 실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세계 최고의 철강왕이다.
 그는 1960년대 철강 불모의 한국에 최초의 일관제철소를 성공적으로 건설했으며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철강사로 성장시킨 한국 철강산업의 큰 별이다.
 철강왕이라 칭송받는 미국의 카네기와 비교해도 박 명예회장의 업적은 우월하다.
 카네기는 당대 35년 동안 연산 조강 1000만t을 이루었지만, 박 명예회장은 당대 25년(1968~1992년) 안에 연산 조강 2100만t을 기록했다. 기술력과 자본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카네기보다 짧은 기간에 두배가 넘는 규모로 성장시킨 것이다..
 현재 포스코는 연산 3700만t 규모의 조강생산을 기록하는 세계 4위권의 철강사다. 최근 철강경기 하락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철강사들을 제치고 시가총액과 신용등급에서 모두 수위를 기록하고 있다.
 포스코가 이같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60~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와 국민들의 성원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박태준이라는 걸출한 리더의 헌신적인 리더십이 보태지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로 평가받고 있다.
 1978년 중국의 최고 실력자 등소평은 일본의 기미츠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라는 대답을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27년 부산 동래군 장안면에서 태어난 박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성장해 1945년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해방으로 학업을 중단한 후 귀국해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인연을 맺었고 훗날 이땅에 최초의 일관제철소 건설이라는 큰 꿈을 잉태하게 된다.
 196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후 경제인으로 변신, 1964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돼 1년 만에 대한중석을 흑자기업으로 바꾸었다.
 그의 경영능력을 높게 평가한 박 대통령으로부터 종합제철소의 건설의 특명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제철소 건설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을 특유의 결단력과 열정으로 극복하면서 `영일만 신화’를 일궈낸다.
 제철소 건설 과정의 여러 일화는 박 명예회장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준다.
 1967년 일관제철소 건설 지원을 위해 조직된 국제차관단이 IBRD의 부정적인 전망으로 와해되자 일본의 유력인사들을 설득해 대일청구권자금을 전용하도록 했다. 자칫 피지 못할 수도 있었던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을 만개하도록 한 것이다.
 이와 함께 포스코의 DNA와도 같은 `제철보국’과 `우향우 정신’은 박 명예회장이 건설 초기 철강역군들을 하나로 만드는 공동의 좌우명이 됐다.
 이 땅에 일관제철소를 건설해 경쟁력 있는 산업의 쌀을 안정적으로 공급함으로써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제철보국’은 포스코의 설립 근거다.
 또한 `우향우 정신’은 선조의 핏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는 일관제철소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며,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는 제철소 건설부지에서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몸을 던지자는 단호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같은 그의 가치관은 지금도 포스코인들의 가슴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포스코 관계자는 “`제철보국’, `우향우 정신’은 국가경제를 생각하고 불굴의 도전 정신을 나타내는 상징이다”며 “포스코가 존재하는 한 그 좌우명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박 명예회장은 공기업 체제에 따르는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기 위해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중점을 두었다. 책임의식은 자연스럽게 완벽주의로 연결됐다.
 1977년 3기 설비가 공기지연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에도 발전 송풍 설비 구조물 공사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80% 정도 진행된 상태였지만 부실공사를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며 모두 폭파한 일은 완벽주의의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
 목욕론도 그의 일면을 이해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다. 그는 “깨끗한 몸을 유지하는 사람은 정리, 정돈, 청소의 습성이 생겨서 안전ㆍ예방의식이 높아지고 최고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며 청결한 주변관리를 주문했다.
 이 때문에 제철소 건설초기부터 현장에 샤워시설을 완비했다.
 1983년 광양제철소 호안공사 시공 때에는 감사팀 직원들에게 스쿠버 장비를 갖추어 전문가 도움을 받아 바닷속에서 13.6Km 호안의 돌을 일일이 확인해 불량시공을 점검하기도 했다. 철저한 비리근절도 박 명예회장의 한결같이 지향했던 경영철학이다.
 1970년대는 설비공급사나 정치권에서 각종 납품 비리나 청탁 압력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그는 정치권의 압력 배제와 함께 설비 공급업자 선정의 재량권 인수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메모에 적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소위`종이마패’ 로 불리운 이 메모는 외부 압력을 차단하고 비리를 근절하는 상징처럼 전해져 온다.
 그는 국가가 군대를 필요로 했을 때 장교로 투신했고, 나라가 현대경제를 위해 기업인을 찾았을 때 기업인이 됐다.
 또한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 정치인이 됐다. 그리고 후진양성을 위해서는 교육인이 됐다.
 1986년 포항공대(포스텍)를, 이듬해는 포항산업과학연구원 (RIST)을 설립했다. 포스코-포항공대-포항산업과학연구원 등 3개의 축으로 하는 산학연 연구개발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포항공대는 박태준 설립이사장과 포스코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986년 12월 국내 최초의`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며 탄생했다. 지금은 국내 정상의 대학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을 일평생 지켜온 박 명예회장.
 그는 1960년대 제철소 건설 초기부터 최근 명예회장으로 재직할 때도 단 한 주의 포스코 주식도 보유하지 않고 무욕의 삶으로 살았다.
 그렇게 살다가 떠난  박태준. 우리는 그에게 어떠한 찬사도 부족할 것이다.
  /이진수기자 jsl@h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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