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 한동윤] 지난 2010년 행정고시에 1만821명이 응시해 244명만이 합격했다. 무려 44 대 1의 경쟁률이다. 지금도 서울 신림동과 노량진 고시원에는 무려 20만명에 가까운 청년들이 신분상승과 출세를 위해 고시 책을 달달 외우고 있다. 그러나 신분상승의 길로 들어서는 고시생은 44명 중 1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43명은 낙오자로 전락하고 만다.
2010년 당시 유명환 외교통상 장관 딸이 ‘맞춤형 특채’로 아버지가 근무하는 외교부에 특채됐다. 그 때 관악구 신림동에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던 고시생들은 분노했다. 그런 식의 ‘계층세습’이 만연하면 고시고 뭐고 무의미해진다고 본 것이다. 특채는 신분상승의 사다리인 ‘고시’의 적(敵)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새정치민주연합의 중진 추미애 의원은 사법고시를 통한 신분상승의 대표적인 케이스다. 당시 오 전 시장 어머니는 집에서 재봉틀을 돌려 만든 이불보를 시장에 팔아 생계를 유지했고 오 전 시장은 학비 낼 때가 되면 친척들에게 돈을 꾸러 다녔다고 했다.
대구 ‘세탁소집 둘째딸’로 알려진 추 의원도 가난을 딛고 ‘고시 사다리’에 올라 정치인으로 성공했다. 부모가 사기를 당해 세탁소마저 날리고 구멍가게를 열자 추 의원은 학업과 가게 일을 병행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대학 2학년까지 사법시험 1차를 통과 못하면 장학금을 끊는다기에 배수진을 치고 공부했죠. 집 연탄보일러가 고장 나 골방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책을 보는데 어머니가 물그릇이 꽁꽁 얼어있는 걸 보고 한숨을 쉬셨어요” 추 의원 회상이다.
이 때문에 대한변협과 서울지방변호사회, 그리고 대한법학교수회가 지난달 29일 ‘기회의 공정성’과 ‘실무능력 문제’를 내세워 ‘사법시험 존치’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특히 사법시험 폐지를 염두에 두고 ‘로스쿨’을 밀어 붙였던 대한법학교수회는 “국민을 무시하고 로스쿨을 밀어붙인 주도 세력 중 하나가 법학교수들이었던 점을 반성한다”며 “2013년 사법시험 존폐를 재논의하기로 약속한 국회는 이 문제를 조속히 공론화하라”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대한변호사협회와 서울변호사회가 28일 사법시험 존치를 위한 입법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동시에 냈다. 이들은 동아일보가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법시험 존치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사법시험에 찬성하는 의견이 75%’라는 결과를 제시하며 사법시험을 옹호했다. 하창우 대한변협 회장은 “75%의 국민이 사시 존치를 원하는 것은 집안배경, 재력, 학력 등 조건에서 만인이 평등한 공정사회를 바라는 국민적 요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과연 사법고시가 ‘집안배경, 재력, 학력 등 조건에서 만인이 평등한 공정사회’를 구현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오히려 육법전서를 달달 외워 판·검사가 돼 세상물정을 모르는 법 집행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이다. 또한 개천에서 용나는 사법고시는 물 건너갔고, 돈 많고 집안 좋은 자식들이 고시를 휩쓸고 있다는 통계도 만만찮다.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행정·외무고시, 사법시험 수험생 10명의 지출명세를 본 결과 한 달 생활비는 120만~170만원 선이다. 고시생들은 쪽방형 고시원 대신 에어컨과 세탁기가 완비된 원룸을 세낸다. 식사는 매월 식권 값만 20만원 안팎이다. 몇 번 ‘외식’하면 30만원이 넘어간다. 책값도 기본서와 참고서를 제대로 갖추려면 한 해 200만원이 필요하고, 강의 테이프 등 추가 교재까지 사면 400만~500만원이 든다. 시험에 떨어지면 판례나 법률이 바뀌고 출제경향도 달라져 책을 새로 사야 한다. ‘유전 합격, 무전 불합격’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사법고시를 포함한 고시를 폐지하는 문제는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고시 한방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거는 ‘로또식’은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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