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도자의 말은 그 나라의 指紋
  • 모용복기자
국가지도자의 말은 그 나라의 指紋
  • 모용복기자
  • 승인 2017.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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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용복 편집국 부국장

[경북도민일보 = 모용복기자]  소설가 최명희 선생은 역작(力作) ‘혼불’을 집필하면서 ‘얼어붙은 강물이 봄날 밤에 풀리는 소리’를 묘사하기 위해 저문 날 북한강에 나가 밤새도록 강가에 앉아 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몇날을 그렇게 한 끝에 마침내 ‘소살소살’이란 의성어를 강에서 건져올렸다. 말(언어)의 엄정함을 잘 말해주는 일화다.
 최명희 선생은 ‘말은 정신의 지문(指紋)’이라 했다. 지문이란 손가락 끝마디 안쪽에 있는 살갗의 무늬로서 사람마다 다르며 그 모양이 평생 변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정신의 지문’은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그 사람의 고유한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함부로 말을 해서도 안되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을 손바닥 뒤집듯 해서도 안 될 일이다. 최명희는 이토록 말의 중요성과 무게를 깨달았던 작가다.
 요즈음 말의 무게를 절절히 느끼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다.
 박근혜 정권의 실패를 철저히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잇단 소통행보로 임기 초 국정수행이 연착륙(軟着陸) 하는가 싶더니 국회에서부터 파열음이 들리고 있다. 야당이 인사청문회에서 정부 각료 후보자들에 대해 잇따라 발목잡기를 하고 있는 모양새다. 어찌 보면 ‘간 큰’야당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방선거가 1년 여 앞으로 다가온 마당에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는 새 정부에 대해 ‘딴죽걸기’를 계속한다면 대선패배 좌절의 아픔을 다시 맛봐야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지 않는가.
 지난달 25일 새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열린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문 대통령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노타이 차림으로 손수 커피를 타 마시며 격의없이 대화를 나눴다. 문 대통령이 “커피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수석들은 “저기에”라며 손으로 가리켰다. 문 대통령이 손수 커피를 내려 마셨음은 물론이다. 충격이었다. 문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받아쓰기, 정해진 결론, 계급장 없는 ‘3無 원칙’을 강조하며 ‘이견을 제기하는 것이 참모들의 의무’라고까지 말했다.
 우리는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시절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참모들과 걷거나 탁자에 둘러앉아 자유롭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TV를 통해 지켜보며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딴세상의 일처럼 여겼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이 문 대통령에게 열광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잇단 ‘사이다 행보’와 고공행진하는 국정 지지율 덕택에 순항할 것 같던 개혁 드라이브가 본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삐걱거리는 분위기다.

 정권 출범 시작과 함께 여야가 이구동성으로 강조했던 협치(協治) 약속이 한 달도 채 안 돼 폐기처분 될 위기에 처했다. 문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약속한 ‘공직 배제 5대 원칙’을 스스로 어겼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 때 병역 면탈,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위장전입, 논문 표절의 5대 비리 관련자에 대해 고위공직에서 원천 배제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
 지난 2월에는 “우리가 이명박·박근혜 정부 인사청문회 때마다 늘 봐온 게 어떻게 장관 후보자마다 이런 게 없는 후보가 없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는 적어도 두 개 정도 비리는 갖고 있어야 장관이 되는 필수조건 덕목”이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야당의 반대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국무총리직에 오른 이낙연 총리를 비롯해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등 조각(組閣)과 관련해 새 정부가 인사청문요청서를 제출한 5명 중 3명이 위장전입 등 문제로 시끌시끌하다.
 인수위 없이 출범한 정권이 준비가 부족했던 탓이 크긴 하지만 그렇다고 문 대통령이 말한 원칙의 무게가 덜어지진 않는다. 야당은 문 대통령이 인사 원칙을 스스로 깼다며 직접 해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준비 과정을 거칠 여유가 없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 대해 야당 의원들과 국민께 양해를 당부드린다”면서도 “총리 후보자의 국회 인준이 늦어지고 정치화됐다”며 인준 지연 책임을 정치권에 돌렸다. 또 “특별히 5대 중대 비리라고 공약했던 이유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인사청문회에서 특히 많은 문제가 됐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자신이 발탁한 인사들의 위장전입은 문제가 안되고 지난 정부 후보자들의 위장전입은 중대 비리라는 자기모순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본인이 내뱉은 말이 국정 발목을 잡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 돌아오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한 말의 무게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말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정신의 지문’이듯 국가 지도자의 말은 ‘나라의 지문’이다. 국민을 향해 한 번 내뱉은 말은 국민들에게 지문이 돼 각인된다. 필요에 따라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약속을 도로 집어삼키고 원칙을 허물기 시작하면 그것은 두고두고 문 대통령을 괴롭히는 화근(禍根)이 될 것이다. 어쩌면 협치 대신 야당과 전쟁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올 지도 모를 일이다.
 문 대통령이 ‘어려울수록 원칙으로 돌아가라’는 본인의 좌우명을 아직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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