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안병욱 선생은 `행복의 미학’이란 글에서 `손은 천재’라며, 사람은 손에 의해서 대표된다고 했다. 어떤 일에 능한 사람을 선수(選手)라고 하며, 무슨 일이든지 마음대로 될 때에 `수중(手中)에 있다고 표현한다. 수예(手藝)나 수공(手工)이란 말은 손의 창조적 재능을 표시하는 용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손은 연장 중의 연장이다’라고 했듯이 인류의 문명은 손의 움직임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손의 상징성은 양면적이다. 사랑과 생산의 상징인 동시에 폭력과 파괴의 상징이다. 그래서 `손(手)’이란 용어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눈에 보이는 손보다, `보이지 않는’ 은유적 의미의 풀이가 더 많다. `손을 놓다’ `손을 타다’ `손(이) 맵다’ `손이 크다’ 등 손의 관용어도 수없이 많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애덤 스미스는 공정한 시장,원리를 설명하며 `보이지 않는 손’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몇 가지의 `보이지 않는 손’이 회자되고 있다. `신정아 게이트’의 두 주역이 짜맞춘 듯 같은 날 검찰에 출두한 것과 대통합민주신당 경선과정에서 친노 후보의 단일화, 이 두 사건에도 권력이 개입됐다는 설이다. 전자는 남북정상회담과 여권의 대선 후보경선에 미칠 악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건을 조기 종결하려는 기도이고, 후자는 친노세력의 이해찬 후보 만들기 프로그램이 가동됐다는 이야기다. 2가지 모두 짐작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진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손’은 늘 존재했다. 그것이 `온기’를 지닌다면 다다익선이다. 그것이 음흉하고 비정한 권모술수라면 보이지 않아 더 큰 문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라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속의 명언을 떠올린다. 오늘의 `아리송한 정국’에서 진실을 찾기 위해 국민은 `마음의 눈’을 크게 떠야 할 것 같다.
/金鎬壽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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