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당신은
  • 뉴스1
눈 오는 날 당신은
  • 뉴스1
  • 승인 2020.01.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9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98세 할아버지를 막 언 땅에 묻고 산소 앞에서 옷을 태우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합니다. 작별 인사를 하고 대 여섯 걸음 발걸음을 옮기나 싶더니 그만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립니다. 2014년 개봉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노부부의 마지막 동행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입니다. 황혼이혼이란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요즘 76년을 같이 살아 온 노부부의 일상인데도 20~30대 젊은이들이 주 관객층이었다고 합니다. 노부부의 순수와 젊은 연인들의 순수가 통했기 때문이겠죠.

노부부는 하루하루가 신혼 같은, 그리고 소년과 소녀 같은 사이입니다. 공짜로 얻어와서 ‘공순이’라고 이름을 붙인 강아지와 ‘꼬마’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키우는데, 공순이는 새끼를 여섯 마리나 낳지만 꼬마는 어느 날 죽습니다. 꼬마를 묻는 날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 한 마디 없습니다. 예감을 했던 걸까요? 그날부터 할아버지의 건강도 나빠져 결국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차근차근 준비해 온 할머니지만 막상 할아버지가 그 강을 건너자 봇물 터지듯 슬픔을 터트립니다.

배우자는 촌수가 없습니다. 0촌입니다. 그러다 보니 무한히 가깝기도 하고 무한히 멀어져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부부를 피보다 더 진한 전생의 인연으로 맺어졌다고 믿었습니다. 사람이 받는 스트레스를 백 가지 정도 꼽아 보면 톱에 드는 것이 배우자와의 사별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여자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변고가 날 가능성이 크며 여자는 남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한 동안 우울 증세를 겪는다고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배우자만큼 많은 추억과 경험을 공유한 사람도 없습니다. 추억이란 자산은 다시 만들 수도 없습니다. 나의 좋고 나쁜 것을 모두 보았고 나의 싫은 점을 지금까지 잘 견뎌주고 수용해왔던 사람이 배우자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배우자에게 보여주었던 단점의 일부만 보여 주더라도 훌쩍 떠나버릴지 모릅니다.

실상 황혼이혼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혼인 지속기간 20년 이상을 통상 황혼이혼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정작 40대와 50대가 황혼이혼의 70퍼센트를 차지하고 60대 이상은 30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연령별로도 60세 이상 남성의 이혼율은 1천 명 당 3.3건으로 40, 50대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이혼할 사람들은 그 전에 많이 이혼하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것은 더 오래 지속할 가능성이 큰 것처럼 오래 이어온 인연은 앞으로 더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배우자가 이처럼 소중한 데도 오히려 고령화 시대에 세태는 거꾸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황혼이혼이 증가하고 은퇴 후에 부부간의 위상에 대한 우스갯소리들도 회자됩니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 시대를 겪고 있는 일본에서는 은퇴한 남자를 ‘젖은 낙엽’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삼식이’라고 부르죠. 동양권 문화에서 이런 경향이 심합니다. 소통이 부족하고 가부장적인 행태가 큰 것도 원인이라 봅니다.

부부는 서로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런데 소중한 자산을 노후까지 오래 가져가려면 누워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자산을 지키려는 공감대가 있고 행동으로 옮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영화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텔레비전에서 곶감이 나오는 걸 보고 할머니가 맛있겠다고 말하자 어느 순간에 할아버지는 방을 나가고 없습니다. 곶감 구하러 나간 것입니다.

저는 눈이 하얗게 오는 날이면 설렙니다. 연애 시절이 생각납니다. 눈 올 때가 가장 설렜고 추운 줄도 몰랐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눈 오시는 날’에서 마지막으로 “담 너머 과부댁 자지러지네”라고 쓰고 있습니다. 눈이 내리면 라디오에서는 가수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라는 샹송을 틀어 줍니다. 그런데 아다모는 눈 내리는 날의 감흥을 다르게 노래합니다. 하얗게 눈이 내리는 밤에 기다리는 연인은 오지 않고 올 것 같지도 않다고 말이죠. 내 마음은 검은 옷을 입고, 하얀 눈물 속에 한 마리 새는 저주하는 듯이 울고 있고, 절망이 나에게 외치는데 아직도 태연스레 눈은 내리네. 모든 것은 절망으로 하얀데 그대는 오늘 밤 오지 않겠지. 아다모가 노래하는 눈 내리는 세상은 ‘모든 게 절망적인 하얀 세상의 하얀 눈물’일 따름이죠. 쌍쌍이 팔짱을 끼고 연인들이 아다모의 샹송을 즐기지만 정작 아다모는 절망에 찬 연인이 보는 하얀 눈물을 노래하고 있는 걸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전에는 멋도 모르고 눈 오는 날 연인과 음악다방에서 아다모의 이 노래를 신청해 듣고는 했죠.

배우자는 노후의 소중한 자산이라 생각하고 잘 관리해야 합니다. 천금을 주고도 추억과 경험을 살 수는 없습니다. 노년에 돈을 많이 벌고 나서 수십억 원을 쓴다고 해도 젊은 시절의 추억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노부부처럼 눈 오는 날에 눈싸움하는 장난을 칠지 아니면 아다모처럼 모든 게 절망적인 하얀 세상이 될지는 당신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곶감이 아니면 영화라도 보러 나가십시오. 김경록 미래에셋 은퇴연구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