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희의 울릉도, 니체의 알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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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의 울릉도, 니체의 알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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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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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곧잘 흥얼거리는 가요가 있다. ‘나 그대에게’다. ‘미스터트롯’에서 모델 출신 가수 류지광이 이 노래를 부르고 나서 벌어진 일이다.

‘나 그대에게’는 싱어송라이터 이장희(73)가 1974년에 발표한 노래다. 이 노래는 1974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에게도 인기다. 정승환 같은 가수가 따라 부르면서 20대들에게도 폭넓게 사랑받고 있다.

류지광 씨가 ‘미스터트롯’에서 ‘나 그대에게’를 부른 다음날 신문에 이장희 씨의 데뷔 50주년 기념공연 관련 인터뷰가 실렸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에 미쳐 공부도 안 하고, 대학교도 중퇴했다. 이걸로 어머니가 우실 때 가슴이 제일 아팠는데 후회한 적은 없다. 난 내가 노래를 할 때면 늘 음악 하길 잘했다고 느낀다.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이장희 씨의 그다음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고 음악을 제일 사랑하는 건 아니다. 1988년 설악산 암자에서 3개월 동안 혼자 살았는데 내가 제일 사랑하는 건 ‘자연’이라고 느꼈다. 매일 아침 산에 올라가고 달밤에 산을 보는 게 너무 좋더라. 1순위는 자연, 2순위가 음악이다”

이장희는 천재 뮤지션이다. 문어체 노랫말이 주류를 이룰 때 그는 일상 대화체로 작사를 했고, 그 노래가 46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 새로운 세대에도 통한다.

젊은 시절에 반짝 빛을 발하다 사라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장희 씨는 10대에 음악을 시작해 20대에 데뷔했다. 한동안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생활하며 라디오코리아를 운영했고, 지금은 완전히 귀국해 울릉도에서 살며 음악을 한다. 그는 왜 울릉도에 살까.

나는 16년간 천재 49명을 발로 연구하면서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그들의 몇 가지 패턴을 발견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씨의 말속에 들어있다.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재능을 발휘하려면 대도시로 나가야 한다. 그곳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극을 받아야 재능이 커진다. 여기에다 무서운 노력을 기울일 때 그 재능이 활짝 꽃을 피운다. 마침내 정상급 반열에 올라선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정상에서 지속해서 좋은 작품을 발표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을 수 있다. 실로 엄청난 자기 절제의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더 충족되어야 한다. 창작의 공간이 대자연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비쇼카 별장, 아서 밀러의 코네티컷 저택, 일리야 레핀의 핀란드만 페트나이, 조지 오웰의 월링턴 오지 마을, 버지니아 울프의 로드맬 몽크하우스, 빅토르 위고의 게르네지 섬, 요한 볼프강 괴테의 바이마르 일름 공원, 헤르만 헤세의 스위스 몬타뇰라, 리하르트 바그너의 반프리트 저택, 프리드리히 니체의 알프스….

이 중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사람이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다. 독신으로 일생을 마친 니체는 평생 정신질환과 두통에 시달렸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두통과 정신질환은 라이프치히 대학 시절에도 간헐적으로 그를 고통에 몰아넣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을 졸업한 그는 박사학위가 없었지만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스위스 바젤대학으로부터 교수직 제의를 받았다. 1869년 스물다섯에 최연소 대학교수로 부임해 문헌학을 가르쳤다. 정신질환은 바젤 시절에도 계속되었다. 두통이 시작되면 대못으로 머리를 박는 것처럼 고통스러워 했다. 정신질환은 시력 약화로 나타났다. 정신질환 증세가 나타날 때마다 그는 알프스 산중으로 들어갔다.

그는 1879년 바젤대학을 사직한다. 정신질환으로 1년에 100일 이상을 병상에 누워 있는 처지에서 양심상 더 교수직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젤대학은 니체의 학문적 공로를 인정해 연금을 지급하기로 한다.

그는 여름철만 되면 알프스의 엥가딘으로 들어갔다. 알프스의 대자연은 언제나 그의 고질(痼疾)을 완화해주었다. 그가 1879년 6월,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나는 이제 이 엥가딘을 내 것으로 만들었네. 아주 놀랍도록 내게 꼭 맞는 곳에 온 것 같군! 나는 이런 유형의 자연과 잘 맞아. 이제 고통이 좀 덜하다네. 이런 느낌을 얼마나 원했던지.’

7월에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숲, 호수, 산책로(저는 반소경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산책로가 항상 저에게 맞아야 합니다), 유럽에서 가장 상쾌한 공기. 제가 이곳을 사랑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니체가 좋아한 알프스에는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주도 있다. 이탈리아 북부,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다. 돌로미테 트레킹 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니체는 가르다 호숫가에 머물며 글을 썼다.

니체가 사랑한 또 다른 알프스는 주를레 마을 근처의 실바플라나 호숫가였다. 이 호숫가 산책길에서 영원회귀 사상이 씨를 뿌렸다. 니체는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평지에 우뚝 솟은 바위를 발견했다. 바위를 쓰다듬으며 이 바위가 어떻게 여기에 놓이게 되었을까를 사유하다가 억겁(億劫)의 시간과 대화를 하게 된 것이 영원회귀사상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렇게 태어났다.

니체는 알프스에서 하루의 반나절 정도를 산책하는 데 보냈다. 점심을 먹고 나가면 5시간 이상씩 산책을 했다. 산책하러 나갈 때는 반드시 호주머니 속에 노트와 연필을 넣고 나갔다. 산책하다가 무엇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 멈춰 바위나 그루터기 같은 곳에 앉아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 광기의 소용돌이 같은 생각을 잡아두려면 빠른 속도로 휘갈겨서 써야 한다. 정서(正書)로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쓴 글을 친구나 여동생이 해독해 출판사용 원고를 다듬었다. 실바 플라나 호숫가에 가면 그 바위에 영원회귀사상의 영감을 주었다는 표지판을 붙여놓았다.

라틴어에 솔비투르 앰블란도(Solvitur Amblando)라는 말이 있다. ‘걷다 보면 해결된다’라는 뜻이다. 산책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에 공감한다. 니체야말로 누구보다 ‘솔비투르 앰블란도’를 실천한 사람이다.

니체는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쓰러졌다. 그 이후 니체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시력을 완전히 잃은 채 칠흑의 고통 속에 신음했다. 유년기를 보낸 고향집 나움부르크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의 간호를 받으며 지냈고, 바이마르로 거처를 옮겨 1900년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알프스가 어머니의 품처럼 그를 품지 않았다면 사상가의 위대한 저작은 태어나지 못했다.

다시 이장희 인터뷰 기사로 돌아가 본다. 그의 주거지는 울릉도다. 울릉도는 산과 바다가 창문 유리창에 붙어있는 곳이다. 기자가 그에게 앞으로의 목표를 물었다.

“인생의 황혼길에 들어가면서 느낀 나의 감정, 쓸쓸함 허전함 안온함 평화로움 행복 등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혹은 가슴 아픈 노래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이 목표를 이룰 것만 같다. 다른 곳이 아닌, 울릉도에 살기 때문이다. 그는 목소리 건강 유지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매일 아침 한 시간 반을 걷는다”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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