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고통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 뉴스1
코로나19의 고통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 뉴스1
  • 승인 2020.03.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로 퍼져 ‘팬데믹’(세계적 대유행·Pandemic)이 됐다. 왜 이 시점에 이런 고통이 우리에게 떨어졌을까? 고통을 야기한 이 전염병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인간이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의도적인 노력을 통해 진입 혹은 도약하기 위해서는, 일상 경험과는 다른 도전적이며 불가능한 경계를 통과해야 한다.

이 무시무시한 터부의 공간과 시간은 남다른 고통을 수반한 역경(逆境)일 수밖에 없다. 역경이란 내가 상상하고 준비한 그런 환경이 아니라. 그의 순진한 의도와 노력이 비참히 무산되는 의외다.

2020년 인류는 ‘코로나19’란 역경을 맞이해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고자 한다. 고통이란,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의 지식으로 지금 엄습하는 자연스런 현상을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 생기는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거부(拒否)다.

육체나 정신이 아직 그 현상을 이해하거나 소화하지 못해, 육체는 병에 들고 정신은 무기력감과 절망감에 빠진다. 왜 코로나19는 이 시점에 인류를 공격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신체는 대개 짝으로 돼 있지만, 하나인 것들도 있다. 귀와 눈은 두 개이고 입은 하나다. 그 이유는 자신의 생각을 입에 담아 내뱉기 전에, 두 번 보고, 두 번 들으라는 경고다. 심오한 관찰과 경청만이 그의 말을 가치가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머리가 하나이고 손과 발이 두 개인 이가 있다. 혁신적인 생각은 두 손을 이용해 만져보고 두 발을 이용해 직접 경험한 후에 모습을 드러낸다.

지혜로운 자에게 이 역경은 기회다. 그는 그것이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동반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는 그 고통을 극복하려는 진정 어린 노력을 통해, 자신도 놀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승화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안다. 어리석은 자는, 그런 역경을 상상한 적이 없다. 그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순조롭게’ 흘러갈 것이라고 착각한다.

우주와 자연은 인간의 상상대로 돌아가는 법이 없다. 현재 인간의 생각의 특징은 언제나 부족하고 편협하기 때문이다.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고 기뻐하면 그 기쁨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춥고 배고픈 겨울이 온다.

겨울이 충분히 지나면 새싹이 돋아나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뜨거운 여름에도 땀을 흘려 노력하게 만든다. 자연은 그 수고를 지나치지 않고 가을의 풍성한 수확으로 보상한다. 사계절의 순환은 고통이란 신비가 만들어낸 섭리다. 고통은 생명의 존재방식이다. 고통이라는 관문을 거치지 않은 생물은 존재할 수 없다. ‘고통’은 외부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성장하기 위한 꼭 필요한 동력이자 기반이다.

동물로 태어난 인간이 신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통과의례가 고통이다. 고통은 인간을 온전한 인간으로 서서히 조각하는 신의 손길이다.

인간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려왔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그리스어로 ‘쪼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 즉 ‘도시 안에서 다른 인간들과 함께 사는 동물’로 명명했다.

인류학자들은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즉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부르며 스스로 자화자찬했다. 사실 인간은 자신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동물이다. 나는 인간을 ‘호모 파수스’(Homo passus), 즉 ‘고통을 감수하는 인간’으로 정의하고 싶다. 인류는 고통을 통해 자연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은 당장의 고통에 반응한다. 동물은 먹을 것이 없거나 다칠 때, 신음한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상상하는 ‘연민’(憐憫)과 미래에 다가올 고통을 상상하는 ‘안목’(眼目)을 통해 생존해왔다. 연민과 안목은 인류의 정신적인 유전자가 되고, 인간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조각가의 정과 망치다. 인간은 언젠가 ‘없음’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사는 유일한 동물이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심오한 고통’은,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고통과 다르다. 그것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거나 화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IT세계는 현실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심오한 고통’은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를 선명하게 응시하고 반응하도록 돕는다. 이 고통은 우리가 가상세계의 동물이 아니라 피와 살로 이루어진 연약한 동물이란 사실을 알려준다. 고통은, 그런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한 변모를 시도하기 위해 진입해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터널이다. 그것은 마치 이유를 알 수 없는 산불이 발생해 죽은 나무들을 태움으로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과 같다. 이 고통은 내가 과거에 집착하던 군더더기를 연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길어지는 고통은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라는 명령이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고통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제 영혼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불행과 병, 그리고 내안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것들은 저의 고질적인 습관들로부터 저를 탈출시킬 백가지 은밀한 탈출구를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니체의 말은 옳다.

고통을 충분히 심오하게 수용하고 그 의미를 깨닫는 행위는, 우리 자신을 관찰하고 개선하겠다는 의지다. 나는 누군가에 의해 이렇게 창조된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이 ‘자기-자신’이라는 인생의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나는 피조물로 태어났다. 그것은 수많은 충동과 이기심이 무질서하게 뭉쳐 있는 덩어리다. 내가 그 덩어리를 방치하면, 내 삶은 비생산적이며 결국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내 삶을 개조할 수 있는 인위적인 창조주다. 나는 나의 의지로 ‘새로운 자신’이라는 새로운 틀에 주조하고 조각하는 장인이다. 고통은 나를 생산적이며, 나에게 맡겨진 고유한 임무에 몰입하는 인간으로 개조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고통은 새로운 창조다. 우리 자신을 개조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고통과 아픔이라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가 저지른 불길에서 스스로를 태워 재가 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가? 우리가 지금 겪는 이 고통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훈련이다.

고통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창조주’를 일깨워, 피조물로 살아왔던 우리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대구와 경북지역에 우리 동료들이, 그리고 방방곡곡과 전 세계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는 의료진이 있다. 우리는 조용히 이 고통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숙고할 절호의 기회다.배철현 고전문헌학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