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도시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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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도시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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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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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개발 정책들은 시류에 매우 민감하다. 주로 등장하는 키워드는 시기별 유행을 극심하게 타기 마련이다. 최근 빼 놓을 수 없는 키워드라면 역시 ‘재생’, ‘스마트’, 그리고 ‘주민참여’와 같은 표현들이다. 정책 보고서 한편에도 이런 표현들은 수십, 수백 번 등장한다. 그런데 최근 팬데믹 상황이 이 키워드 하나하나를 박살(?)내고 있다. 특히 재생 정책은 피해가 막심한 상황이다. 외지인의 방문을 막기 위해 지역마다 벚꽃축제를 없애고, 있는 유채꽃밭도 갈아 없애는 상황이다 보니, 사람의 왕래를 토대로 하는 재생정책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리 없기 때문이다. 스마트 정책의 허점도 드러났다. 위기 상황에서 절실한 것은 첨단 IT 도시가 아닌 고작 마스크의 생산과 공급일 수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주민참여와 같은 키워드도 그렇다. 만남과 접촉을 자제해야하는 시기에 주민들의 참여활동은 언감생심인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키워드들이 담고 있는 가치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팬데믹 세상의 도래는 그동안 유행하던 정책의 의미를 뒤흔들고, 지역의 생존과 직결되는 보다 근본적인 정책방향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 두 달여를 되도록 지역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며 생활하다 보니, 지금은 잊혀진 ‘자족도시’라는 표현이 문득 떠올랐다. 사실 ‘자족성’, ‘자족도시‘는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는 가장 핫한(?) 정책 키워드였다. 신도시나 혁신도시, 기업도시 같은 정책들이 이 개념에서 출발했을 만큼 당시 그 영향은 작지 않았다. 어느 도시이건 자립적인 생활여건, 생활기반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좋은 직장과 고급 서비스 기능을 갖추지 못해 계속 인구가 유출되어가는 지방도시에게 더욱 절실한 개념이다.

그런데 이런 키워드가 2000년대 이후에는 급격히 실종되어갔다. 무엇보다도 세계화, 정보화의 거센 물결이 그 원인일 것이다. 반나절이면 지역을 벗어나 세계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는 시점에 자족도시라는 말은 왠지 고립적인 느낌을 준다. 몇 번의 터치면 해외 상품도 살 수 있는 여건에 자족성은 심지어 원시적인 개념 같기도 하다. 자족성 개념은 세계화, 정보화에 모순되거나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개방성을 우선하는 정책 풍토 속에 억울하게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하지만 팬데믹 사태 이후 각 지역과 나라는 마치 세계화 이전의 시대로 돌아간 것만 같다. 지난 20년간 추구하던 개방성이란 가치가 불과 두 달 만에 뒤집어지고 고립성이 다시금 자리 잡은 느낌이다. 하지만 고립은 어차피 지방도시의 갈 길이 될 수는 없다. 언제까지고 축제를 없애고 유채꽃밭을 갈아엎을 수는 없다. 장기화 되어가는 팬데믹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책 방향을 찾아야 하고, 이를 규정해 줄 키워드를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한동안 잊혀졌던 ‘자족성’, ‘자족도시’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자족성은 한 지역 내에서 생활과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 여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다.

개방성의 반대말이 아니다. 개방과 고립, 그 어느 상황이라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든다는 생태학적 개념인 것이다. 자족성의 개념을 산업경제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차원까지 확장해서 지역의 갈 길로 삼았으면 한다. 지역의 청년들이 지역에서 고용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는 정책은 물론, 재난의 시대에 필요한 제품과 서비스들이 지역 내에서 자체적으로 공급될 수 있게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마트건 재래시장이건 간에, 일단은 대도시 의존을 줄이고 지역의 상권이 자립할 수 있게 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문화적인 자족성을 강조하고 싶다. 젊은 층이 대도시로 유출되는 가장 큰 요인이 바로 문화서비스에 대한 갈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증을 없애 줄 문화생태계를 지역에 조성하는 것은 단지 문화정책 차원을 넘어 지역의 생존과도 직결된다.

도시학자인 제인 제이콥스는 창조적 도시는 ‘외부에서 수입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자체적으로 대체해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도시’로 정의했다. 개방과 세계화의 시대에 이런 정의는 일견 무의미해보였지만, 팬데믹 시대에 다시금 그 의미가 진하게 다가온다. 자족성이라는 가치관을 다시금 꺼내어 먼지를 닦아줄 때가 된 것이 아닐까. 따지고 보면 도시재생도 타 지역의 사람을 끌어오기 이전에, 지역민 스스로가 지역의 자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일 것이다. 팬데믹 상황과 고립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지역 도시들의 분투를 기대한다. 김주일 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 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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