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프는 다시 재생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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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프는 다시 재생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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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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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를 들으며
오성은 작가
-잃어버린 유재하를 찾아서

분명 내겐 유재하의 테이프가 있었다. 테이프가 늘어나 제대로 재생되지 않았던 그 앨범은 빨간색 금성사 카세트 속에서 한동안 지냈고, 책상이 생긴 이후 서랍 속에 들어 있기도 했다. 신발 상자에 담겨 장롱 위로 구석으로 창고로 밀려난 테이프는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언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사실 잃어버렸다는 건 거짓말이다. 나는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사에 익숙해졌고, 많은 것들을 버리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그 테이프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압에 찌그러져 분해되었을까, 먼지가 되어 어딘가로 떠다니고 있을까, 바람이 되었을까, 해 질 무렵의 노을이 되었을까.

이제 나는 그 테이프가 어디로 갔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얇고 검은 반투명 테이프는 점점 더 늘어나 찢기고 잘려 더는 무엇도 재생할 수 없었으리라. 빛이 든 필름처럼 무용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테이프라 부를 수 없었고, 그럼 무엇이라 부를까 보니, 그건 그야말로 부를 이름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로 남았다. 테이프가 아닌 테이프는 유재하가 아닌 유재하가 되었고, 음악이 아닌 음악으로 남았으며, 예술이 아닌 예술로 남아 있다. 언젠가 찾아올 나의 죽음도 그 테이프 아닌 테이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유재하를 처음 알게 된 중학교 무렵, ‘사랑하기 때문에’의 가사를 외운 건 순전히 누군가에게 불러주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러주고자 했던 대상은 없었고, 그래서였을까 나는 자주 슬펐다. 바야흐로 사춘기에 입성하여 울긋불긋한 여드름을 달고 다니면서도 그게 생체적 변화가 아닌 감정적 변화에 따른 변신이라 느껴졌다. 그렇다. 나는 유재하와 함께 변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단 나의 변화만은 아니었다. 유재하 역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나를 통과해 나의 흥얼거림이 되었고, 아르페지오가 되었으며, 눈물이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가 짓고 부른 ‘사랑하기 때문에’와 내가 부르는 ‘사랑하기 때문에’는 전혀 다른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맥락 안에서 나는 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계속 변화하는 중이다.

유재하를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통기타가 아닌 피아노가 내 방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떤 악기도 없었을 것이다. 밤과 농담과 슬픔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게 되어 참 다행이다. 나에게는 밤도 농담도 슬픔도 중요하고 그 세계가 유재하의 영향이라는 걸 느끼는 지금의 상태가 좋다. 유재하를 알고 지냈던 그 시절의 내가 기특하기까지 하다.



-가리워진 길

이제는 편히 디지털로 그를 들을 수 있지만 나는 좀체 그런 방법으로는 듣지를 못한다. 그의 목소리는 아니지만, 차라리 내가 부르는 게 그와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음악은 참 신기하다. 어떤 음악은 오래 머금고 있으면 있을수록 내 삶을 결정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니까. 우리들의 사랑, 그대 내품에, 텅빈 오늘밤,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가리워진 길, 지난 날, 우울한 편지, 사랑하기 때문에, 가 그렇다. 내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제목들이다. 요즘은 계속 ‘가리워진 길’을 흥얼거리게 된다. 하루하루 오르막 길을 오르는 기분에서일까, 안개 속에 있는 기분 때문일까. 저 먼 곳에서 유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조심스레 발을 내밀어본다.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대학생 시절,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에서 연달아 두 번 낙선하고, 이후로 혼자 음악을 만들고 있다. 그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서였고, 그의 음악을 닮고 싶었다. 예선에서 낙선한 노래는 늘어난 테이프처럼 빛바랜 물성이 되었지만, 오늘이 지나면 다시 불러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지는 중이다. 유재하를 생각하며 지은 노래니까, 그를 통과해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지금 이 시절도 점점 늘어나고 중간중간 찢겨 잊힐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우울해지지만, 그런 상태가 나쁜 일인 것 같지는 않다. 테이프는 내 안에서 다시 재생될 것이고, 감길 것이며, 노래가 될 것이다. 어느 밤이 노래가 된다면, 나는 밤이 되어도 좋겠다. 내가 잃어버렸던 테이프가 재생되는 근사한 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테고.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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