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도 계속 음악을 들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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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도 계속 음악을 들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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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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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음악을 고르며
작업실

스무 살이 지난 이후로 2년 넘게 한 장소에 산 기억은 드뭅니다. 정말 2년을 주기로 이사를 했어요. 가장 멀리 떠난 이사는 군대였죠. 짐도 없이 갔다가 2년 동안 건강하게 지냈답니다. 이후로는 학교 앞 원룸, 오피스텔, 외국에서의 떠돌이 생활, 부모님 댁, 그리고 지금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가 바로 나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엉덩이를 깔고 안정적으로 살 때도 됐는데, 병이 도졌는지, 새 작업실을 구해서 짐을 옮기는 중이예요. 짐의 90%는 책이고, 종이이긴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가방에 몇 권씩 담아서 나르고 있는데, 옮겨도 옮겨도 끝이 보이지 않아 돌을 굴리는 시지프스가 된 기분이 듭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서 고생하는 중이고, 보태자면 그게 내 인생이지 싶습니다.

작업실 창문 가득 들어오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자니, 쳇 베이커의 음악이 생각납니다. 아무래도 턴테이블도 가져다 놔야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느 장소이건 그 시기의 음악이 있었어요. 유년기에는 메탈이 그러했고, 군대에서는 R&B, 학교 앞 원룸에서는 재즈, 오피스텔에서는 EDM을 들었습니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은 팝송과 포크, 부모님 댁에서는 클래식, 지금은 뭐 가리지 않고 듣고는 있지만, 다시 이 시기를 돌아보면 재즈로 귀결될 것 같아요. 작업실에서는 무얼 듣지, 이런 고민은 정말 행복하네요.



이사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자주 꺼내어 살피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로 발췌독을 하는 편인데, 동시에 여러 권을 읽다 보니 당최 끝나지 않는 책들이 부지기수네요. 하지만 소설만은 다릅니다. 한 소설가의 단편을 진득하게 차례대로 읽어나가는 일은 그 혹은 그녀를 진지하게 만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살아가건 그런 만남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음악이 꼭 그러합니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서 바로 내가 선택한 아티스트와 만나야 하는 게 내가 지향하는 음악감상입니다. 그래서인지 다소 편협한 리쓰너가 되어가는 기분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한 가수에 대한 존경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소설도, 음악도 내게는 만나는 일의 일부입니다. 당신과 내가 만나는 일, 세상 모든 게 실타래처럼 얽힌 만남의 일환인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앞으로 만날 수 있는 아티스트가 한정적이라는 사실에 돌연 슬퍼집니다. 예술은 영원할지라도 우리는 늙어 사라지는 존재. 이 관계의 오차가 나를 다급하게 만들어요. 한 권이라도 더 많은 소설을 읽고 싶고, 한 장이라도 더 멋진 앨범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삶은 조급함으로 채워지지 않죠. 그저 때가 되면 새로운 동네의 공기를 마시고, 적응했다 싶으면 다시 떠나는 게 전부인 것만 같아요. 천상병 시인이 소풍이라 했듯, 나는 삶을 이사라고 말하고 싶네요. 내 삶은 이사만 다니다 끝내게 될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계속 음악을 들읍시다

그리고 이사는 계속됩니다. 이제 나는 어떤 음악을 들으면 좋을까요. 작업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습기의 수증기 같은 음악, 창틀에 맺힌 햇살 같은 음악, 책장에 꽂힌 시집 같은 음악, 바닥에 뒹구는 먼지 같은 음악, 아이들이 공을 차며 노는 소리, 고양이의 앙칼진 울음소리, 전등에 느껴지는 희미한 전파의 흐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수시로 움직이는 내 발끝, 타자기를 두드리는 손가락, 마우스 커서를 누르는 검지, 깜박거리는 눈꺼풀, 내쉬는 숨, 들이마시는 숨, 이내 찾아오는 졸음, 그 나른함에서 오는 미세한 선율.

나는 어디로 이사를 다니게 될까요. 나는 어떤 소설을 읽게 될 것이고, 어떤 음악을 듣게 될까요. 세상은 내가 모르는 것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일을 계속할 것이고, 해낼 자신도 있습니다. 그러니 새해에도 계속 음악을 들읍시다, 라고 떠들어대는 것 쯤은 이해를 바랍니다. 그건 내가 희망할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대한 가능성이냐고요? 흠, 무엇에 대한 가능성일까요. 소설도 음악도 그리고 이사도 모두.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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