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탐험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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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탐험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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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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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은의 사적인 LP
빌 에반스의 ‘Exploration’을 들으며



도레미파솔라시도로의 탐험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는 존재만으로도 위대한 앨범일뿐더러 세션 주자들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데 의미가 크다. 존 콜트레인과 캐논볼 애덜리, 폴 챔버스와 지미 콥, 윈튼 켈리, 그리고 빌 에반스. 그 중 존 콜트레인과 빌 에반스는 언젠가 다룰 작정으로 듣고 또 듣길 거듭하지만, 막상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사적인 나의 언어는 늘 음표보다 납작해지고 만다. 특히 빌 에반스는 ‘Waltz for debby’를 위해 여태 아껴두었는데, 그에 관해 써야 할 순간이 오고 말았다. 돌연히 특정 뮤지션이 솟구치는 순간이 있고, 그건 재즈의 관성과 흡사하다.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번에 주목할 앨범은 ‘Exploration’이다. 1961년 세상에 나와 빌보드 재즈 비평가 상을 수상했고,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와 드러머 폴 모티안이 참여한 이 앨범은 탐험(탐구)이라는 주제답게 한 가지 주제를 깊이 파고든다. 넓은 세상으로의 탐험이라기보다는 깊은 세계로의 탐험이라 부르고 싶다. 피아노 프레임(88개의 건반)은 한정적이고, 음은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윤회하며 반복적인 프레이즈를 재현한다. 우리 몸이 한순간 지구 바깥으로 튀어 나갈 수 없듯, 음악가는 중력의 한계 안에서 숨을 쉬고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그러나 빌 에반스의 절제된 아름다움에는 분명한 깊이가 있다. 한 음에 대한 탐험과 탐구, 그것이 이 앨범의 주제다.



우리가 모두 눈이 멀었다면

그런데 하필이면 아껴두었던 ‘Waltz for debby’를 쓰지 않고, ‘Exploration’에 담긴 보석같은 발라드 ‘Elsa’를 발견해 쓰고자 한 것인가. (누구라도 물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건 한 학생의 대답 때문이다. 대학에서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한 해 넘게 비대면으로 강의가 진행되는 중이다. (모든 강의가 그런 건 아니지만요) 학생들은 영상을 통해서 강의를 듣고, 가상대학 게시판에 남겨둔 토론이나 퀴즈에 답을 단다. 나는 ‘눈 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을 자유롭게 바라보길 요청했고, 학생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남겼다.

“모두가 눈 먼 상황이라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겠는가?”

다소 단순한 질문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 질문은 두꺼워진다. 나는 학생들의 답변을 읽어나갔고, 한 학생의 답변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고야 만다.

귀하의 답변 : 눈이 먼 첫 순간에는,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빌 에반스의 ‘Elsa’를 들으며 의자에 앉아, 어떻게 적응해 나갈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 후에는 가족들과 회의를 통해 어떻게 식량을 구하고, 일상을 유지할지 이야기하고, 생활 규칙을 정할 것입니다.(중략)



빌 에반스를 탐험하는 밤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빌 에반스의 ‘Elsa’를 듣겠다니. 눈물을 머금은 티슈처럼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간직한 이 재즈 발라드를 듣겠다니. 곧장 멜로디가 스쳐 지나가는 듯 했다. 빌 에반스가 피아노 의자에 앉은 자세와 숙인 고개, 부드러운 목선, 가볍게 얹은 손, 경직된 듯 하면서도 평온해 보이는 표정이 떠올랐다. ‘눈 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내가 얻고자 한 답은 어쩌면 이것이라는 걸 바로 이 학생을 통해서 확인하게 되었다. 여린 빗방울 같은 드럼의 하이햇 심벌즈와 책장을 넘기는 것 같은 섬세한 콘트라베이스, 마음의 이야기라 할 수밖에 없는 빌 에반스의 슬픈 몸짓, 저절로 움직이는 것만 같은 건반, 흐르는 선율, 열리는 시간, 닫히는 밤. 이내 모든 눈은 감기고, 우리는 눈 먼 자들이 된다. 정직하지만 우수에 찬 빌 에반스, 그대는 다른 무엇도 아닌 밤이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가 그 답변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상’이다. ‘눈 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서 내가 찾고자 했던 바는 일상이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그리고 천천히 학생들이 남긴 답변을 들여다본다. 각자의 상황과 각자의 분노와 각자의 행복과 각자의 숨과 각자의 일상은 피아노 건반처럼 돌연하게 솟아나, 내게 온다. 나는 조급하지 않게 그들과 함께 이 도시의 일상을 기다린다. 우리는 눈이 멀지 않았다, 아직 눈이 멀지 않았다고 되뇌면서, 이 밤을, 빌 에반스와 함께 탐험하는 중이다.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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