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미국의 타임즈지는 밀레너리를 맞아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사고, 이벤트 등 100가지를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건’을 발표했다.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을 비롯 에이즈바이러스의 발견, 복제양 돌리의 탄생, PC운영체계 DOS의 등장 등 100년간의 쇼킹한 사건 사고들이 망라됐다. 거기에 먹는 피임약 개발 시판도 그 중 하나로 당당히 올랐다. 이 약의 개발 시판보다 더 크게 여성의 해방에 기여한 문화적 사건도 없었다고 본 것이다.
1955년 미국에서 개발돼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먹는 피임약은 `사전피임약’이다. 이 약 개발 20여년 후 다시 성적교접 후에 먹는 `사후피임약’이 개발돼 나왔다. 관계 후 72시간 내에 먹으면 약품에 함유된 호르몬이 배란을 억제하고 수정을 교란해 임신을 막는다고 한다. 그런데 세계 각국에선 이 피임약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의사의 처방 없이도 수퍼나 약국에서 살 수 있도록 해야 하느냐, 전문의약품으로 의사 처방을 받아야만 살 수 있도록 해야 하느냐 하는 논란이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가 사후피임약을 사전피임약처럼 일반의약품으로 지정할 움직임을 보이자 지금 종교계 여성계, 의료계 시민단체 등으로 제각각 나뉘어 찬반이 분분하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궁금한 게 있다. 이 약 때문에 병의원을 찾은 여성에게 의사는 무엇을 묻고, 어떻게 진찰하는가이다. 별다른 문진(問診)이나 의료행위 없이 부끄러워 쭈볏거리는 여성의 모기소리만한 말에 의지해 처방전을 써 주는 게 현실이라면 굳이 의사 사인이 있어야만 살 수 있게 묶어둘 필요가 있겠는가. 인간세상엔 임신을 원치 않는 사랑행위도 적잖이 있을 테고 극심한 수치감 때문에 병원에 가길 포기하는 사람도 많을 게다.
정재모/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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