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레이디, 33년3개월 만에 청와대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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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레이디, 33년3개월 만에 청와대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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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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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누리당 박근혜 당선인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던 시기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사진 위쪽부터) 제17대 국회의원 당선자 총회에서 한나라당 당기를 흔드는 모습.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실시된 19일 밤 여의도 당사를 방문,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
 박근혜 당선인 걸어온 길

     5選의원·여권 비주류 수장 거쳐 첫 여성대통령 새 역사
     18년 칩거생활…`원칙·신뢰’가 최대 정치적 자산 부각
    `민생대통령’ 약속…불통·역사관 극복 진정성 보여줘야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19일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역사를 썼다.
 지난 2007년 대권 도전에 실패한 이후 5년간 절치부심한 끝에 이번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거센 추격을 뿌리치고 1979년 이후 33년3개월 만에 청와대에 다시 들어가게 됐다.
 올해 만 60세인 박 당선인은 부녀(父女)가 모두 국가 최고지도자가 되는 세계적으로도 진기한 기록의 주인공도 됐다.
 지난 1997년 정치에 입문한 그는 세종시 수정안 논란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맞서 원안을 고수하는 과정 등에서 `원칙ㆍ신뢰’를 자신의 최대 정치적 자산으로 부각시켰고 이를 통해 대세론을 확산할 수 있었다.
 또 5선의 다양한 의정경험과 당이 위기에 처했을 때 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준 것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호(號) 선장’이라는 중임을 맡게 된 이유로 해석된다.
 그러나 끊임없이 제기된 불통 이미지와 부친의 과거사를 둘러싼 역사관 논란은 그의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이 때문에 박 당선인은대선공약으로 내세운 `국민대통합’의 이행을 위해서라도 향후 조각과 정책의 집행 과정에서 세대와 이념을 포괄해 전국민을 아우를 수 있는 리더십을 선보여야 한다는 막중한 시대적 과제를 안게 됐다.
 
 ■ 박정희의 딸, 퍼스트레이디 대행 그리고 15년의 靑 생활
 박 당선인은 1952년 2월 경상북도 대구에서 육군 정보학교장이던 아버지 박정희 대령과 소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육영수 사이의 2녀 1남 중 장녀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동생은 근령(훗날 박서영으로 개명)과 지만이다.
 아홉살 되던 1961년 당시 소장이던 부친은 5ㆍ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고 2년 후인 63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 당선인은 당시 외할머니 집에서 초등학교(장충초등학교)를 다니다 중학교(성심중학교)에 입학한 64년 초 청와대로 들어간다.
 청와대에서 중ㆍ고교 시절을 보낸 박 당선인은 1970년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전자공학과(서강대)를 택해 대학에 진학했다.
 한국 전자산업의 대부인 김완희 박사가 청와대에서 부친에게 “수출을 늘리려면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한 이야기를 들은 게 계기였다고 한다.
 대학생활을 마친 74년 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유학 생활은 6개월만에 느닷없이 끝이 났다. 그해 8월15일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8ㆍ15 경축식장에서 간첩 문세광의 총탄에 스러지자 급거 귀국한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꼽을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컸던 박 당선인은 당시 충격에 대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찬바람이 불었다”고자서전에 적었다.
 그러나 박 당선인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을 틈도 없이 22살의 나이에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분주한 삶을 살게 된다.

 ■`배신’에 대한 한(恨)…18년의 `칩거’
 박 당선인은 1979년 10월26일 또 한 번의 비극을 맞는다. 부친인 박 대통령의 서거였다.
 사고 시간 뒤인 27일 새벽 1시 김계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직접 관저로 올라와 잠자리에 들어있던 박 당선자를 급히 깨운 뒤 박 전 대통령의 유고 소식을 전했다. 그의 첫 마디는 “지금 전방은 괜찮습니까”였다고 자서전에서 소개하고 있다.

 충격은 컸다. 그는 “한 분도 아니고 부모님 모두 총탄에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가혹한 이 현실이 원망스러웠다”며 “핏물이 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했다.
 박 당선인은 9일장을 마치고 서울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만 15년간의 청와대 생활을 마감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청와대 금고에서 발견한 돈 중 6억원을 박 당선인에게 전달했다. 이번 TV토론에서 박 당선인은 “어린 동생들과 살 길이 막막한 상황에서 배려하는 차원에서 준다고 했을 때 경황없는 상황에서 받았다. 나중에 다 환원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박 당선인은 81년부터 84년 7월까지는 당시 영남대 이사이던 신기수 경남기업 회장이 증여한 서울 성북동 주택에서 살았다. 1984년 장충동으로 이사했다가 1990년현재의 서울 삼성동 단독 주택으로 옮겨 정치권에 입문하기까지 18년간 `칩거’ 생활을 이어갔다.
 이 기간은 박 당선인에게 암흑기와 같았다. 박정희 체제 하에서 잘나가던 인사들이 대부분 등을 돌렸다. 이 때문에 박 당선인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향후 정치 행보에서 `변절자’를 그토록 단호하게 대한 것은 이런 개인적 경험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는 해석이 많다.

 ■ 정치 입문ㆍ대권 도전 고배 그리고 재도전 성공
 박 당선인은 1997년 11월 한나라당에 입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대선 유세 지원활동을 벌였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는 위기를 방관할 수 없었다는 게 정계입문 변이었다.
 공식 정치활동은 이듬해 4월 치러진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이후부터다. 2000년에는 당 총재 경선에 출마, 이 전 총재에 이어 2등을 차지하며 부총재로 당선됐다.
 2001년에는 이회창 대세론에 반발, 상향식 공천과 당권.대권 분리 등 `7대 당 개혁안’을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해 `미래연합’을 창당했다.
 이런 가운데 2002년 5월에는 방북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철도연결’ `금강산댐 공동 안정성 조사’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협의했다.
 요구한 개혁안의 상당 부분이 수용되지 같은해 후반 재입당한 박 당선인이 `정치인 박근혜’로 거듭난 것은 불법대선자금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고 나서다.
 이른바 `천막당사’ 시절 그는 4ㆍ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싹쓸이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만들어내며 개헌저지선을 확보했다.
 그는 이후 2년3개월간 당 대표를 지내면서 5차례의 국회의원 재ㆍ보선과 지방선거에서 여당에 40대 0의 완승을 거뒀다. 이기간 여당 대표가 8명이나 바뀌었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닉네임도 붙여졌다.
 2006년 5ㆍ31 지방선거 유세 당시 괴한에 테러를 당해 생명이 위험할 뻔 했지만퇴원 직후 전국을 돌며 선거를 승리로 이끌어낸 장면은 박 당선인의 승부욕과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는 평가다.
 박 당선인은 여권이 2004년 말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립학교법 개정을 시도했을 때 `장외 투쟁’을 이끌었다. `소신ㆍ강단’과 `지나친 보수성’으로 평가가 엇갈렸다.
 2009~2010년 정국을 달궜던 세종시 수정안 논란이 대표적이다.
 이 대통령과 달리 박 당선인은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원안을 고수했다. 박 당선인은 `판정승’을 거뒀고 이후 다시 당을 장악했다.
 그는 2011년 10ㆍ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직후 홍준표 대표가 사퇴하자 비대위원장으로 취임, 2012년 4ㆍ11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152석을 차지하는 대역전승을 거두며 당의 유력 대권주자로 입지를 굳혔다.
 올 대선에서 새정치를 앞세운 안철수 전 무소속 대선후보의 지원을 등에 업은 문 후보와의 치열한 본선에서 힘겨운 승부 끝에 대권을 거머쥐며 자신이 종종 말했던 “저는 대한민국과 결혼했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의 행복만 생각하겠다”는 약속을펼쳐보일 기회를 갖게 됐다.
 박 당선인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선친을 꼽는다.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했고 원칙을 지키는 리더십을 가졌다는 이유에서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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