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자의 내밀한 심리·파동 시로 엮어
화류
정영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123쪽 l 8000원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정주하지 않고 도처에서 떠돈다. 그럴수록 더욱 헛헛하다. 인생이 곧 방랑일까.
“서로의 몸을 무릎 위에 올리는 갸륵한 꿈을 헤매는 동안/바람이 심장을 만지작거리다가 체온을 묻혀간다// 그러면 나는 어느 사막의 어느 사구의 어느 모래무덤의 어느 모래알의 어느 모퉁이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그러면 나는 더 이상 나를 못 알아볼 수 있을까// 무릎을 숨긴 치맛단 같은 알을 품은 새들의 눈이 더는 슬프지 않을까// 사는 내내 비밀이 생기는 건 버리고 싶은 몸이 하나씩 는다는 것이어서// 숨을 참을수록 비참하다”(‘피에타’ 중)
2000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시인 정영이 첫 번째 시집 ‘평일의 고해’ 이후 9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시집 ‘화류’.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숨을 참을수록 비참’해지는 생의 비밀을 바라본다.
일상의 이면과 생의 불협화음에 대한 시선을 아름다운 시어로 담아온 정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떠도는 자의 내밀한 심리와 그 파동에 대해 노래한다.
“이 도시에선 모두 전등 아래 모여 앉아/서로의 언어를 알아듣는 척하느라 고개 끄덕이기 바쁘고/우아하게 턱을 괴고 웃다가 집에 돌아와/사전을 만드느라 밤마다 두통에 시달리지”(‘가련한 사전’ 중)
“매일 상해가는 몸으로/약속을 하고 건투를 빈다// 탄생이란 수행을 허겁지겁 마치고/커피를 마시며 다음 수행을 위해/매무새를 가다듬고// 달린다 어디서든 줄을 서서 기다린다/탄생도 이렇게 조급증을 내며 기다렸을까//(…)// 달린다 가슴을 내밀고/죽음이란 마지막 수행을 향해서// 봄이면 꽃 속에 들어앉아 건배한다/숲 속의 평화로운 새처럼// 잔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 달린다 죽어라 당신을 사랑한다”(‘잔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 중)
‘잔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라는 시는 탄생의 그 이전부터 기다리고 달려야 했던, 또 죽음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 생의 과정을 나열한다.우리는 살기 위해 노력하고 사랑을 한다. ‘잔다’는 것의 의의를 두고 살아가는 삶은 어쩌면 가장 진솔한 삶의 방식이 아닐까.
이번 시집에 묶인 마흔한 편의 시 대부분은 미 발표작이다. 지난 10년 가까이 시인은 산문으로 무대 위 노래 가사로 독자들과 만나왔다. 그가 쓴 노래 가사들은 창작 뮤지컬 ‘남한산성’과 ‘라디오스타’ 등 수 편으로 그의 시적 감수성이 무대에서 발현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붉은 빛으로 물든 시집 ‘화류’의 표지는 화려한 꽃과 그 불빛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때론 뜨거운 피가 흐르는 생의 의지이기도 하다.
정 시인이 말한다. 막막한 어둠 속에서 먹먹한 마음이 돋아난다고, 그것이 인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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