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죽음’ 인간 근원적 문제 사랑스러운 할머니 마테아 통해 무겁지만 무겁지 않게 그려
빨리 걸을수록 나는 더 작아진다
셰르스티 안네스다테르 스콤스볼 지음 l 손화수 옮김
시공사 l 188쪽 l 1만원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책, 저마다에도 어울리는 계절이 있다. 그것은 책이 가진 그만의 향취와 내용이 가진 무게감이 만들어낸다.
노르웨이 작가 ‘셰르스티 안네스다테르 스콤스볼’의 첫 소설 ‘빨리 걸을수록 나는 더 작아진다’는 가을의 향취를 가진 소설이다.
“나는 부엌 창문을 통해 맞은편에 자리한 아파트 건물을 바라보았다. 엡실론과 내가 존재하는지조차 까맣게 모른 채 저곳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도대체 이웃은 왜 있는 것일까. 그들은 바쁜 척 집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죽는다.”(39쪽)
소설 속 주인공 마테아는 백 살 가까운 할머니다. 어릴 적부터 작고 보잘것없어 남들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줬던 앱실론과 결혼한 뒤, 평생 그와만 대화하며 집안에서만 살아왔다. 그러던 그녀가 그가 죽은 뒤,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세상을 향해 걷기 시작한 이유는,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해 썩은 뒤 발견될까 겁이 나서다.
그녀는 아파트 마당에 자신의 흔적을 담은 타임캡슐을 묻는 등 엉뚱한 행동을 하며 타인과 소통하기를 꿈꾸지만 현실은 막막하기만 하다.
그녀는 용기를 내 노인회관 ‘만남의 시간’에 참석하지만 평생을 남편밖에 몰랐던 그녀에게는 너무나 어렵다.
소설의 중후반 그녀의 전부였던 남편 역시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며 마테아의 쓸쓸함은 극에 달한다.
“오늘은 좋은 일이 단 하나도 없었다. 정말 최악의 날이야, 마테아, 그러니 앞으로 남은 날이 얼마 없다는 게 정말 기쁜 일이지. “인내심을 가지고 살아온 자여, 이제 평화로이 쉴지어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문득 전화기의 뚜뚜 하는 소리를 떠올렸다. 왜 우리는 자연과 삶에 항상 낙천적인 생각을 가져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지금 당장 자리에 드러누워 죽으면 안 되는가”(91쪽)
내성적이고 순진하며 사랑스럽기까지 해 안쓰러운 마테아. 저자는 외로움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사랑스러운 할머니 마테아를 통해 무겁지만 무겁지 않게 그린다.
188쪽이라는 길지 않는 분량 속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사유가 짙게 묻어 나온다. 그것은 아마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20대 근 2년 동안 병과 싸우며 온종일 누워있어야 했던 작가의 경험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그것은 암울했을 그 시간이 준 단 하나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계절은 흐른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자란다. 너와 나는 따로 또 같이 걷는다. 그러는 사이 우리가 된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야 가을이 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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