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 정재모]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는 이런 말도 남겼다. `겸손이란 야심가의 위선이거나 노예근성의 비굴이다.’ 어떤 계기에, 어느 글에서 한 말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인간의 겸손이란 게 무언가를 노린 허위의 몸짓이거나 줏대 없는 자들의 굽실거림이라고 본 냉소적 통찰에 눈길이 간다.
`스스로 잘났다고 여겨 타인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는 명심보감 구절도 겸손하라는 주의이고, 주역 64괘중엔 겸괘(謙卦)도 있다. 교만하지 않는 겸손을 옛사람들은 처세의 수단으로 강조했던 것 같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추기는 몸짓이야말로 말처럼 쉽지 않은 게 인간이다. 인간에게 있어 진짜겸손이란 있을 수가 없고 위장겸손이 있을 뿐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겸손이 속마음과는 달리 위장된 거라는 스피노자의 갈파에 개인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19대 국회 원내 거대여당인 새누리당을 제2당으로 끌어내린 4·13총선 이후 곳곳에서 `겸허’ 사태가 났다. 선거에서 패배한 여당도, 여당의 패배 덕에 이긴 야당도 입만 벌렸다 하면 어김없이 `겸허’다. 야당의 겸허하지 않은 `겸허’ 발언은 빼놓더라도 개표 직후 여당대표가 의례적인 어투로 `민의를 겸허히…’ 운운한 데 이어 그 측근 김성태 의원이 한 라디오인터뷰에서 또 `엄중한 심판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운운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18일 수석비서관회의 때 똑 같은 표현을 했다. 지금 인터넷에 겸허를 쳐보면 그야말로 `천지빛깔’로 겸허겸허겸허다. 겸허히 받아들이고 처신하겠다는 거야 누가 뭐라 하겠는가만 그 속마음까지 깊이 그런 건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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